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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을 기행

여름 내내 계속된 가뭄에 저수지가 마르고 논바닥은 타들어 갔다. 오랜 가뭄 끝에 폭우로 시작된 장마가 또다시 농민들의 애간장을 까맣게 태워놓고 팔월로 들어서서야 물러갈 채비를 한다. 무을(舞乙), 고향에 대한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보니 네 해 만에 찾아가는 길이다.      도로변 첩첩 산들이 비를 잔뜩 머금고 능선을 타고 넘으려는 구름과 버겁게 씨름하고 있다. ‘부산에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하나 너도 이제는 없는데….’ 라디오의 허스키한 노래 가사가 마치 내 마음속에서 구름처럼 일었다 사그라지기를 반복하는 생각을 들여다본 것 같다.   여주에서 들어선 중부내륙 고속국도는 장호원, 충주, 단양, 문경, 상주를 거쳐 선산을 지날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서울과 충청, 경상을 연결하는..

소백산과 부석사

8.15 광복절이다. '광복 70주년 계기 국민 사기 진작'이라는 명목으로 국무회의에서 광복절 하루 전 날인 금요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친구들과 차를 몰아 소백산으로 향했다. 산행은 소백산 줄기 단양과 풍기를 잇는 해발 760미터 고치령 고개에서 시작된다.고치령은 태백산이 끝나고 소백산이 시작되는 백두대간의 주능선으로 서남쪽으로 내리 뻗은 태백산 줄기와 낮아지는 소백산 줄기가 만나는 해발 760미터 고개다. 이 고개 너머 북쪽 마락리는 경북 영주에 속하지만 고개를 등지고 충북 단양을 바라보고 있어 '영남의 고도(孤島)'라 불린다고 한다. 길을 오가던 보부상의 말이 자주 떨어져 마을 이름이 마락리(馬落里)라고 한다. 고개를 넘으면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이고 좀 더 북쪽은 영월군 감삿갓면으로 김삿갓 유적..

영남 알프스를 찾아서(I)

부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밀양역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탄 무궁화호는 고속철도와 달리 차창 밖을 스쳐 지나는 풍경을 음미하는 재미를 덤으로 준다. 낙동강을 따라 달리는 말이 갈퀴를 곤두세운 듯한 산맥과 지는 태양이 어우러지며 펼치는 금보라 빛 노을이 장관이다.밀양 역에서 내려 서울서 출발한 친구들과 합류했다. 산객들의 로망, 밀양 울산 양산 청도 경주의 접경에 자리한 해발 1천 미터 이상 9개 고산 군락을 영남 알프스라고 부른다. 산행 전초기지로 밀양을 택하여 새벽까지 짧은 밤을 묵기로 했다.산객들의 로망 영남 알프스밀양 역엔 온전히 밤이 내려앉았다. 밀양(密陽), 2007년 칸의 여왕을 탄생시킨 영화 '밀양(Secret Sunshine)'을 떠오르게 하는 도시다.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

나비야 장봉도 가자

영종도 운서동에서 지척인 삼목항으로 향했다. 신도를 거쳐 장봉도를 오가는 첫 배가 7시에 출발한다. 차량과 사람들이 삼목항 선착장 주변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다. 배표는 매표소에 신분증과 함께 탑승자 명부와 코로나 19 신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구입할 수 있다.옹진군 보건소 소속 직원 서너 명이 선착장 입구에 열화상 카메라를 세워 놓고 발열 검사기로 탑승객들의 체온 검사를 한다. 다행스럽게 옹진군 내에서는 코로나 19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았고, 사전투표나 투표를 마치고 섬을 찾는 외지인들에 의한 코로나 19 전파를 예방하려 특근 중이라고 한다. 선착장 가장자리나 해변에서 갈매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루를 시작할 채비를 하고 있다. 세종 1호가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선착장으로 들어오자 스무여 명 승객에..

운길산, 수종사의 종소리

지난주부터 전국이 장마에 접어들었다는 일기예보다. 남부는 제법 비가 내렸다는데 중부는 찔끔거릴 뿐 비다운 비가 없었다. 어제도 독수리 오줌처럼 찔끔거리다가 말았다.팔당대교를 건너는 길 한강의 이쪽저쪽 산군이 안개에 싸여 모습이 희미하다. 팔당 2리 마을 앞 슈퍼에 들러 음료수와 김밥 한 줄을 사서 배낭에 넣었다. '등산객 좀 있나요?'라는 물음에 주인 양반은 유행도 수시로 바뀐다며 요즘은 라이딩과 등산보다는 낚시가 대세란다.마을 초입 노인요양시설 건립을 반대하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내걸렸다. 우리가 목도하는 고령사회를 지나 곧 닥칠 초고령 시대에는 요양시설 수요가 넘쳐날 것이고, 서로 앞다투어 시설 유치에 뛰어들지도 모를 일인데... 나이가 들면 누구나가 의탁할 노인요양시설이 어째서 혐오시설이 되었는지 의..

경주 남산, 불국토의 꿈

572돌 한글날이다. 6시 반 경 연제동 세관 숙소를 나서는데 동네 가로수에서 까치들이 평소의 까마귀를 대신해서 깍깍깍 거리며 호들갑스럽게 아침인사를 건넨다.부산역발 KTX 열차가 30여 분 만에 신경주역에 도착했다. 시내버스가 선도산을 좌로 휘돌아 터미널 쪽으로 들어서자 오른쪽 멀리 너른 들 한가운데 긴 병풍처럼 솟아있는 남산이 보인다.경주시내에 내려 노서리 고분군을 가로질러 황리단길 입구에서 용장리행 버스를 탔다. 황남대총 천마총 등 거대한 무덤들의 완만한 선이 천의무봉 넉넉한 달항아리의 곡선과 닮았다.나지막하고 품위 있는 기와 고택들이 늘어선 시내를 벗어나 남산 서편과 형산강 사이로 난 포석로를 따라 천관사지 나정 포석정 삼불사 망월사를 거쳐 용장리에서 버스를 내렸다.일단의 산객들이 모여있는 마을 ..

삼성산, 성인들의 산

설 연휴 마지막 날 배낭을 들고 삼막계곡으로 향했다. 경인교대 교정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호암산 삼성산 학우봉을 한 바퀴 돌 요량이다.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배낭을 챙겨 내리는데 집에서 모자를 챙기지 않았다. 날이 그리 춥지 않고 바람도 없어 다행이다. 정각 8시에 삼막천을 건너서 학우봉 능선을 등지고 호암산 쪽으로 발을 내딛는다.까치들이 칵칵 호들갑스러운 인사를 건넨다. 하늘에선 비행기들이 지나는 길답게 간간이 굉음이 울려온다. 능선 허리를 질러 오르다가 뒤돌아보니 안양 시가지와 수리산이 온전한 모습을 보이고 반대편 능선 위로 태양도 온전히 얼굴을 내밀었다.채 30분이 되지 않아 서울과 안양의 경계를 이루는 호암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 자락에 올라섰다. 관악의 이웃답게 능선 곳곳에 기묘한 모양의 ..

설악 공룡능선 번개 산행

관문(關門)에 들어간 후 삼십구 년 여의 긴 항해를 마치고 어제 퇴임식을 가졌다. 포항에서 짐을 챙겨 칠백 리를 달려 집에 도착하니 늦은 오후가 되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거실은 펼쳐 놓은 짐으로 어수선한데 서둘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도 그럴 의욕도 솟질 않는다. 오후에 P와 차를 몰고 속초로 향하고 있다는 B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새벽 설악산 소공원을 출발해서 공룡능선 코스 원점회귀 등반을 할 요량인데 함께 하자고 한다. 퇴임식을 한 지 만 하루 만에 뜻하지 않은 즉석 원정산행 제의에 망설이고 있는데, 아내가 딱히 해야 할 일도 없으니 다녀오라고 한다. 설악산, 그것도 험하기로 이름난 공룡능선을 이처럼 번갯불에 콩 튀겨 먹듯 따라나서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학과 직장 생활을 같이 한 스..

영월 태화산 힐링 산행

장마가 지나고 열대야가 지속되더니 태풍이 다녀갈 차례인가 보다. 9호 태풍 종다리가 지나가고 10호 태풍 산산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있다. 친구들을 위해 수고를 기꺼워하는 M의 차량에 H, B와 함께 탑승하여 이른 아침 영월로 출발했다. 서울을 벗어나 원주와 제천을 지나고 38번 국도를 따라 영월로 들어설 때까지 산하는 내내 안개에 잠겨 있다. 접근성이 좋지 않은 강원도 첩첩 산 너머 오지에 있어 이제나저제나 하던 태화산(太華山) 산행을 결행키로 한 것이다. 산림청 선정 한국 100대 명산 중 하나인 태화산은 해발 1,027m로 강원도 영월군과 충청북도 단양군의 경계에 자리한다. 영월군으로 접어들어 고씨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택시에 올라 종주 산행 반대편 들머리인 흥교마을로 향했다. 태화산로에서 갈라진 ..

정선 가리왕산 아라리

진부 IC로 내려섰다. 가리왕산을 찾아가는 길 진부면 산뜻한 마을을 지나 오대천을 따라 난 59번 도로 옆 산기슭으로 밭뙈기들이 스쳐 지난다.목적지에 다다를 무렵 '들머리 장구목이가 해발 400여 미터니 해발 1561미터 정상까지 약 1100미터를 올라야 한다'는 산행대장의 말에 자못 긴장이 된다.정선군 북평면 숙암리 장구목이골 입구 산행 들머리에 도착했다. 가리왕산은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과 북면 그리고 평창군 진부면 사이에 있는 산이다. 옛 맥국(貊國) 갈왕(葛王 또는 加里王)이 피난하여 성을 쌓고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국도 옆 오대천은 이십 여 리를 더 달려서 정선 여량에서 출발한 조양강에 안겨 들 것이다. 그 조양강은 지천을 끌어안으며 동강으로, 영월에서 서강과 만나면서 다시 남한강으로 이름을 바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