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 산 기행

영남 알프스를 찾아서(I)

인산(仁山) 2024. 8. 31. 13:23

부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밀양역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탄 무궁화호는 고속철도와 달리 차창 밖을 스쳐 지나는 풍경을 음미하는 재미를 덤으로 준다. 낙동강을 따라 달리는 말이 갈퀴를 곤두세운 듯한 산맥과 지는 태양이 어우러지며 펼치는 금보라 빛 노을이 장관이다.

밀양 역에서 내려 서울서 출발한 친구들과 합류했다. 산객들의 로망, 밀양 울산 양산 청도 경주의 접경에 자리한 해발 1천 미터 이상 9개 고산 군락을 영남 알프스라고 부른다. 산행 전초기지로 밀양을 택하여 새벽까지 짧은 밤을 묵기로 다.

산객들의 로망 영남 알프

밀양 역엔 온전히 밤이 내려앉았다. 밀양(密陽), 2007년 칸의 여왕을 탄생시킨 영화 '밀양(Secret Sunshine)'을 떠오르게 하는 도시다.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신명 난 듯 간드러진 가락의 친숙한 밀양 아리랑도 생각이 난다.

밀양 시내를 지나는 밀양강은 영남 알프스 군락과 그 주변 고봉준령에서 발원한 크고 작은 물길을 끌어안고 남진해서 낙동강에 안겨든다. 보물 147호로 우리나라 최고의 누각 가운데 하나로 칭송받는 밀양강변 영남루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그 주변에는 아리랑 노래비, 천진궁, 아랑각, 무봉사, 박시춘 옛집 등도 자리한다. 말없는 밀양강은 많은 얘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늦은 저녁을 든 후 터미널 부근 파크텔에 짐을 내리고 짧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새벽 예약해 둔 택시로 원서리 석골사 입구에 5시경 도착했다. 석골사는 영남알프스 산군의 하나인 운문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한다. 하늘에 뜬 하현달이 등 뒤에서 그림자를 만든다. 새벽 공기는 차서 자꾸 옷깃을 여미게 한다.


계곡 물소리에 맞춰 부지런한 산새들이 미명의 새벽을 깨우려는 듯 수다스럽게 지저귄다. 들머리 오른편 계곡에 길게 드러누운 폭포는 어둠 속에 하얀 기둥을 만들었다.

사찰 마당 입구 바윗돌에 연꽃을 든 동자승과 '석골사'라고 적힌 흰색 글씨가 또렷하다. 마침 새벽 예불 중이라 아담한 절집 극락전에서 소종 소리가 은은하고 청정하게 울려 나온다.

어둠을 몰아내는 새벽처럼 번뇌를 깨트리고 지혜를 깨우치려는 소리다. 문 틈새로 보이는 스님은 고적해 보이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나직이 울리는 종소리가 스님의 평정심을 짐작케 한다.

석골사 오른쪽 계곡을 끼고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오르다가 좌측 억산으로 가는 갈림길을 버리고 높은 능선 위 하늘을 바라보며 상운암 쪽으로 향했다. 운문산-가지산-능동산-천황산-재약산을 거쳐 표충사로 내려가는 30km여 코스를 목표로 운문산 깊은 품속으로 한 발짝씩 발을 옮겼다.

 

상운암으로 오르는 길은 힘겹다. 자갈길을 지나고 계곡을 건너고 짧은 풀을 편편한 머리에 인 정구지 바위와 바위가 깨져 쏟아져 내린 비탈도 지난다. 초입부터 유난히 힘겨워하는 M을 위해 계곡 바위에 걸터앉아 한입 깨무는 사과가 꿀맛이다.

산길에서 만나는 해학과 위트

비탈에 비스듬히 걸린 거대한 바위 아래 가지런히 걸쳐 놓은 부러진 나무 가지들이 눈길을 끈다. 엄지 손가락 굵기 나무 가지가 어찌 버팀목이 될까마는 해학과 위트와 함께 걸쳐 놓은 이의 마음이 엿보여 빙그레 미소 짓게 한다.

고도가 오르고 골이 깊어지자 내내 따라오던 계곡 물소리는 멀어졌다. 능선이 가까워지면서 바람은 중저음으로 웅웅 거리고 산죽 군락은 몸을 낮추고 일렁인다. 등산로 옆 야생화들도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들린다. 날이 밝아 오고 신록으로 치장한 산은 새소리, 계곡 물소리, 산죽과 야생화 등 바야흐로 백화제방이 임박한 봄이다.

나무 빗장이 걸린 상운암 암자는 움막처럼 수수한 모습이다. 구름 위 암자라는 이름답게 운문산 정상 바로 아래 해발 천 미터 높은 곳 너른 터에 자리한다. 상운암 뒤 능선 너머에서 태양이 아침인사인 듯 산객과 눈을 맞춘다.

 

능선에 올라서면 힘겨워하는 산객을 제 식구 감싸 안듯 정상까지 3백 미터 능선길이 인자하게 맞이한다.

'호거산 운문산 해발 1188M' 너른 굄돌 위 둥그런 화강석 표지석이 놓인 운문산 정상에 섰다.

 

서쪽으로 억산과 범봉, 반대편으로 가지산과 영알 준봉이 연이어 늘어섰다. 산 아래 가지산, 천황산, 재약산 등 1천 미터 넘는 고봉에 둘러싸인 산내면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좁은 우물 속에 갇혀 서로 엉겨 싸우는 속인이 아니라 큰 아량과 품격을 갖춘 대인다운 모습은 영남알프스라는 이름이 걸맞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랫재로 발길을 옮긴다. H는 발 빠르게 앞서가고 M은 몸 상태가 좋지 않은지 자주 멈추어 선다. 해발 700여 미터 아랫재까지는 급격히 고도가 낮아지는 가파른 구간이다. 쌓인 낙엽은 산행객들의 발에 밟히고 다져져 낡은 천조각처럼 헤져있다.

제 자리를 알고 지키는 것들은 아름답다.

오아시스 같은 아랫재 쉼터에서 휴식하며 힘을 충전했다. 서울서 일박 이일 산행 버스를 타고 왔다는 두 여성은 가지산을 앞에 두고 혀를 내두르며 최단 하산 코스인 상양 마을로 발길을 옮긴다. 한계를 알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절제는 자신과 타인을 편하게 한다. 그들의 결단에 박수를 보내며 무사 하산을 기원했다.

 

가지산 줄기 능선으로 들어서니 사방이 터졌고 다른 방향과 코스의 산객들도 하나 둘 스쳐 지난다. 들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그 꽃들은 거센 바람에 시달리고 꽃잎을 떨구면서도 제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제 자리를 알고 지키는 것들은 아름답다.

 

아랫재에서 가지산까지는 두 시간 반여의 만만찮은 거리다. 왼쪽 옆으로 가야 할 능동산, 천황산, 재약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능선길이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영알의 맹주답게 바위로 뒤덮인 위엄스러운 해발 1241미터 가지산 산정에 올라섰다. 산객들은 정상 여기저기에서 장쾌하게 펼쳐진 파노라마에 취해 자리를 뜰 줄 모른다.

가지산에서 중봉을 지나 석남고개로 내려가는 길은 바위와 자갈길이다. 올라오는 산객들이 힘들어 보인다. 발바닥은 화끈거리고 입속엔 침이 마르고 다리는 자꾸 무거워진다. 내려온 길을 다시 오르라면 억만금을 주어도 마다하지 싶다. 인생을 한 번 더 살고 싶으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손사래를 치듯이...

석남고개 방향을 잃어 1km를 허비했다. 오후 1시가 지난 시각 그늘을 찾아 배낭을 열고 점심을 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힘든 기색이던 M이 적당한 탈출로를 찾겠다며 뒤처지기로 했다.

 

천애 절벽 자일 하나에 매달린 아버지와 아들 딸, 맨 아래서 자신의 로프를 자르라는 아버지, 영화 '버티칼 리미트'의 장면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다. 근처에서 얼음골까지 케이블카가 운행하니 탈출은 용이하리라는 생각으로 억지 위안을 삼았다.

철쭉과 진달래 고목 군락이 밀집한 능동산 초입 길바닥에 누가 일부러 뿌린 듯 진달래꽃이 떨어져 있다. 철쭉은 초파일 봉축등을 밝힌 듯 연분홍으로 만개했다. 능동산 막바지 구간은 계단길이다. 불규칙적인 산길과 달리 계단 길은 발을 내딛을 때 주위나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여유를 주어 좋다.


능동산 오르는 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그 정상부는 큰 능처럼 둥글다. 해발 983미터 능동산에서 천황산까지 긴 능선 아래 넓은 사면은 온통 억새밭으로 꽃이 진 억새 숲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다.

온 세상에 도(道)가 바로 잡히고 넘치면 좋겠다.

능동산 너머 천황재 아래까지 난 임도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걷기를 편하게 하는 도로(道路)처럼 도덕(道德)은 덕을 편하게 하고 도량(道量)은 양형을 편하게 하니 온 세상에 갖은 도(道)가 바로 잡히고 넘치면 좋겠다.

정상 서쪽이 사자머리를 닮아서 사자봉이라 불리는 해발 1188미터 천황산에 올라섰다. 동남쪽 분지처럼 평탄한 800 고지 사자평은 화랑과 사명대사의 승병의 훈련 터였다고 한다. 천황재로 내려가는 길, 바닥으로 치닫는 체력과 또 하나의 영알 고봉인 재약산을 눈앞에 두고 H와 지루하게 의견이 오갔다.

천황재에는 젊은 산객들이 벤치가 딸린 너른 탁자 위에 놓였던 산행 도구들을 챙기며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채비로 분주하다. 지척에서 위용을 자랑하는 재약산을 오래도록 눈에 담으며 표충사로 하산 길을 택했다. 표충사로 내려가는 직선 길은 가파르고 지그재그 길이 끝이 없을 듯 지루하게 이어졌다.

빠른 길로 탈출한다던 M도 뒤쳐져 뒤따라오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다행이고 한편 미안한 마음이다. 오후 6시경 표충사에 도착해서 경내를 둘러보았다. 30여 분 후에 도착한 M을 완주한 마라톤 주자를 맞이하듯 반겨 맞았다.

영남알프스 첫 산행은 능력과 한계, 만족과 겸허를 깨우치는 소중하고 힘든 여정이었다. '단디' 마음먹고 하루에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세 개 산 '만디'를 밟은 날로 오래도록 기억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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