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 산 기행

지리산에 안겨서 별을 품다(I)

인산(仁山) 2024. 8. 21. 12:25

 

지리산 노고단의 일출 전 모습

 연일 기온이 30도 중반에 육박하여 폭염주의보 알림 메시지가 수시로 날아든다. 지리산 산행 대장정을 위해 21:30경 집을 나섰다. 지리하게 머물던 장마전선은 물러갔고 한 두 시간 전부터 가늘게 내리던 비도 그쳐 다행이다.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동서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동행할 친구들도 목동, 화정, 일산에서 각각 출발한다는 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약 한 달 전에 친구들과 벼르고 벼르던 지리산 산행 날자를 잡았었다. 이번 산행의 코스는 성삼재를 출발하여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주 능선을 거쳐 대원사로 내려서는 이박삼일 일정의 소위 '성대종주' 산행이다.

지리산 첫 종주산행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대학 친구들과 함께 화엄사를 출발해서 중산리로 내려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장터목에서 추위와 싸우며 야영을 했던 처절한 기억과 쏟아져 내릴듯 밤하늘을 가득 빛나던 황홀한 별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한 차례 더 중산리에서 출발하여 천왕봉에 올랐으나 정상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뿐 산행 기록을 남기지 않아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 때문인지 30여년 만에 다시 지리산 종주산행을 결행하기로 하고 D데이를 기다리며 마음은 한껏 기대와 설렘에 부풀었다. 지리산 종주산행이 처음이라는 H와 B도 기대가 남다를 것이다.

한편으론 무거운 배낭을 매고 긴 시간 먼 거리를 무사히 종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출발하는 날을 기다리며 장거리 산행에 필요한 큰 용량의 배낭, 에어매트, 버너 등 장비와 삼일 간의 식량 등을 틈틈이 준비했었다. 가급적 최대한 줄이려 했지만 배낭 무게는 10kg을 훌쩍 초과했다.

동서울 터미널에 여유롭게 들어서서 먼저 도착한 M과 H, 뒤이어 도착한 B와 합류했다. 하늘에서 천둥 소리가 간간이 들리고 비도 제법 내리기 시작한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전국 각지로 떠나는 버스의 출발지인 동서울 터미널은 재건축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편의점 식당 등 여객 편의시설을 찾아볼 수가 없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의 목적지 지리산 성삼재로 가는 23:00 발 버스가 출발하는 34번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성삼재에서 2.7km 거리 노고단 대피소까지는 산길이라기 보다는 느슨한 오르막으로 비포장 도로에 가깝다. 앞서 출발한 M을 뒤쫓아 나머지 일행 셋은 해드랜턴에 의지해서 발길을 재촉했다. 짊어진 배낭의 무게에 익숙해지지 않은  어깨는 힘겨워 하지만, 노고단에서의 일출을 보리라 계획했던 터라 일출 시각까지는 여유가 있어 걸음은 느긋하다. 밤새 소나기가 내렸는지 등로 곳곳에 만들어진 물웅덩이를 피하며 무넹기를 지나고 나무계단길, 자연석을 깐 너덜길 등을 거쳐 다섯 시에 못미쳐 노고단 고개에 도착했다.

고개 한편에 배낭을 내려 두고 노고단으로 향했다. M이 미리 노고단 출입신청을 해둔 터라 인원 확인 후 입구로 들어설 수 있었다. 노고단을 오른쪽으로 휘돌아 오르는 나무 데크 길 주변은 키 작은 관목과 초목만 무성하여 시원스레 전망이 트였다. 고개를 젖히니 능선에 걸려 있는 오리온 자리와 그 위쪽의 카시오페아 등 익숙한 별자리들이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별들은 여명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검푸른 하늘 속으로 하나 둘 모습을 감춘다.

이십여 분 만에 노고단에 올라서니 키를 훌쩍 넘어서는 높이의 노고단 표지석과 그 뒤로 기단처럼 돌을 쌓아 올린 원뿔꼴 모양의 탑이 맞이한다. 노고단 아래 우뚝한 송신탑은 눈에 띄는 유일한 인공물이고 온 골짜기를 채운 운해 사이로 구례 화엄사 쪽 마을의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너울처럼 새하얀 운해 위로 다도해의 섬처럼 드러난 능선이 겹겹 펼쳐져 있고, 일출 시각이 가까와질수록 여명이 시시각각 어둠을 몰아내며 동편 능선과 하늘 사이에 수평으로 길게 그은 가는 붉은 빛 노을을 점점 더 하늘로 넓게 펼치기 시작했다.  

많은 산객들이 일출 시각에 맞춰 속속 노고단 정상으로 모여 들었다. 기다리던 일출 시각 05:45이 가까와지고 사방을 훤히 분간할 수 있게 될 즈음 반야봉 뒤로 겹겹 늘어선 능선 위로 태양이 홀연히 붉은 빛을 뿜으며 노을을 뚫고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노고단 일출은 동해 해변의 일출에 비해 태양의 크기는 구슬처럼 작아 보였지만 그 빛은 그 어디에서 보던 일출보다 더욱 영롱하고 강렬했다. 일출을 보고 대피소로 되돌아 내려오는 길엔 어둠이 완연히 물러나고 시야가 더욱 트여 운해의 장관이 더욱 선명하게 눈 앞에 다가왔다.

산행 첫날 시작부터 노고단 일출과 더불어 지리산 10경 중 제3경인 '노고단 운해'를 직접 보는 행운까지 누리는 셈이다. 지리산 제5경 '벽소령 명월'은 초승달이 뜬 하늘이 대신하겠지만, 날씨와 시각이 맞아 떨어진다면 제1경 '천왕봉 일출'과 제8경 '연하선경'도 눈앞에 목도하는 행운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돼지령 부근 백두대간 산림조사원들

 

지리산에서 만난 들꽃


남녀노소 삼삼오오 모여든 승객들은 하나같이 크고 무거운 배낭을 버스 화물 칸에 넣고 차에 올라 빈 좌석을 거의 다 채웠다. 버스는 지리산 산행을 가는 승객을 태운 등산버스인 셈이다. 뇌우를 동반하는 빗속으로 나선 버스는 쉼 없이 밤길을 달려 다음날 02:40경 지리산 성삼재(性三峙)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첫날인 오늘 산행은 성삼재를 출발해서 노고단, 임걸령, 노루목, 반야봉, 삼도봉, 화개재, 토끼봉, 연하천 대피소, 형제봉을 거쳐 벽소령대피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튿날 코스는 벽소령을 출발해서 선비샘, 칠선봉, 영신봉, 세석평전, 촛대봉, 삼신봉, 화장봉, 연하봉을 거쳐 장터목대피소까지로 계획했다. 마지막 날인 3일째는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볼 수 있기를 고대하며 이른 새벽 장터목을 출발해서 제석봉을 거쳐 천왕봉을 오른 후, 중봉을 거쳐 대원사로 이어지는 하산길에 오를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해발 1,102m 성삼재에 발을 디디니 팔에 스치는 바람이 서늘하다. 옅은 구름이 잔물결 치는 검푸른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뭇별들이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라던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지리산은 이번 산행의 첫 대면부터 총총 빛나는 별들이 가득히 밤하늘에 대한 고대를 십분 충족시켜 주었다.

주차장에서 계단을 올라 휴게소로 이동해서 일단의 산객들과 어우러져 떡과 음료 등으로 이른 아침을 들었다. 휴게소와 붙어 있는 24시간 무인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고 반바지를 긴바지로 갈아 입고 윈드자켓을 꺼내 입는 등 산행 채비를 했다. 일행과 함께 주차장 가장자리 한편에 서있는 지리산 깃대종 반달이 동상 앞에서 인증 샷 한 장을 남기고 03:40경 성삼재를 뒤로하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여섯 시경 노고단 출입구로 되돌아 내려와서 지리산 주 능선을 따라 임걸령으로 향한다. 이처럼 이른 시각에 마주오는 산객이 있어 어디서 오냐고 물으니 노고단 인증 스탬프를 찍으러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경사가 거의 없는 너덜길과 관목 숲길 등이 길게 이어진다. 저번 주 고도가 이곳과 비슷한 계방산에서 눈마춤했던 동자꽃 모싯대 등 들꽃들이 이곳 등로 주변 곳곳에서 눈에 띈다. 관목이 다하고 돌탑이 나타나는 곳에 산림청 백두대간 식생조사단원들이 내어준 자리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등로 우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산너울 사이 수많은 골짜기들은 여전히 운해에 잠겨 있다. 평탄한 돼지령과 피아골삼거리를 지나 07:30경 임걸령에 닿았다.

임걸령의 샘물은 듣던 것과 달리 끊길듯 끊기지 않으며 간질나게 졸졸졸 흘러 내린다. 물주걱에 물을 받아 물통을 채우고 있던 젊은 남녀 산객 한 쌍이 자리를 비켜주며 주걱를 건네는 아량을 베푼다. 줄어든 물병을 채울 마음을 접으며 노루목으로 향한다.

매년 두어 번 지리산을 찾았다는 M의 말대로 노루목까지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노루목으로 향하는 길 좌측 앞쪽으로 반야봉의 원만한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노루목에 올라서서 바위 무덤 주변에 배낭을 내려두고 지리산 제3봉인 반야봉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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