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 산 기행

지리산에 안겨서 별을 품다(IV)

인산(仁山) 2024. 8. 21. 12:48


산행 세째 날이다. 잠이 깨어 시각을 보니 여느날보다 이른 자정이 조금 지났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복도로 에어매트를 들고 나와 미리 접어 두었다. 후끈하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대피소 실내와 달리 바깥은 한기가 느껴질만큼 서늘하다. 하늘엔 별들이 총총하다. 스마트 폰으로 담아보려던 생각을 접고 눈을 크게 열고 마음에 담아 본다.

일출 시각은 05:40경이지만 새벽 세 시 반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각에 장터목 대피소를 출발해서 1.7km거리 천왕봉으로 향한다. 랜턴으로 등로를 밝히며 제석봉으로 오르는 걸음이 가파른 비탈에 익숙해졌는지 덤덤히 받아들인다.

몇몇 산객들도 눈 띄는데 배낭을 짊어진 산객이 있는가 하면 스틱만 짚고 오르는 산객도 있다. 많은 산객은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나 대원사 쪽으로 내려가는 험로를 피해 장터목으로 되돌아 내려와서 쉬운 등로로 하산하는 코스를 택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터목에서 출발한 지 20여 분쯤 거리에 '제석봉 고사목' 제하의 안내판과 그 뒤로 고사목 몇 그루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모습을 보인다. 1950년대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숲이 울창했는데, 도벌꾼들이 도벌의 흔적을 없애려 불을 질러 지금처럼 나무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제석봉 고사목 지대가 장관이라고 하지만, 어둠으로 인해 탐욕에 눈이 먼 인간들이 초래한 광경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뒤로 걷는 동행의 랜턴 불빛이 발밑으로 향할 때마다 하늘에서는 점점 밝게 빛나는 별무리가 언뜻언뜻 눈에 들어온다. 천왕봉과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외로이 서있는 한 그루 고사목은 가지마다 초롱초롱한 별을 가득 달고 서있다. 바윗돌 덮개가 덮인 암벽 사이로 철계단이 놓인 통천문을 통과하면 천왕봉 정상이 지척이다.

여명이 채 밝아오기 전 어렴풋이 사방이 분간될 즈음 천왕봉에 올라섰다. 일출까지는 한 시간여가 남았다. 정상 바로 밑 옛 성모상(聖母像)을 모신 신당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되는 널찍한 평지에 올라 나란히 서있는 '천왕봉 성모상', '천왕봉의 의미', '지리산 천왕봉' 제하의 안내문을 랜턴 불빛에 비추어 읽어 보았다.

지리산 성모는 천왕(天王), 천왕할매, 마고(麻姑)할매, 마야부인(摩耶夫人) 등으로도 불리는 지리산 수호여신이다. 1970년대 초까지 천왕봉에 있다가 없어진 것을 1978년 혜범(慧凡) 스님이 다시 찾아서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 벌써 올라와 있는 산객은 족히 3~40명은 되어 보이고 삼삼오오 끊이지 않고 속속 정상으로 모여든다. 등 뒤편 올라온 등로 쪽에서 불어오는 이른 새벽 바람이 매섭고 차다. 일출 시각까지는 한참이 남았지만 차츰 여명이 희미하게 밝아 오자 정상 표지석 주변에는 인증 사진을 남기려는 산객들이 하나둘 모여 든다.

표지석 앞면에 '智異山 天王峰 1915 M' 뒷면에 '韓國人의 氣想 여기서 發源되다'라는 글귀가 각각 쓰여 있다. 뒷면 '韓國' 글귀가 흐릿한데 그 연유를 찾아보니 아래와 같다.

"1982년에 새로 세운 이 표지석 뒷면의 당초 글귀는 '嶺南人의 氣想 여기서 發源되다'이었다. 뒷면의 글귀 중 '嶺'자가 '慶'자로 바뀌었다가 '慶南'이란 글자가 누군가에 의해 망실이 되었다. 그후1980년대 중반 산악인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慶南'이란 글자 자리에 '韓國'이하는 글자를 다시 새겼다."
_출처: 100san.tistory.com '지리산 천왕봉 표지석 변천사'

일출이 시작되기 전 잔잔한 수면처럼 평평한 구름의 바다 위로 노을이 긋고 있던 일직선 붉은 선은 점점 더 두터워 지며 푸르스름하게 밝아 온 하늘 높이 퍼져나갔다. 산 아래 안긴 마을의 불빛이 골짜기를 따라 길게 이어졌고, 오른편 능선 가운데 갇힌 구름은 하얀 눈으로 덮인 호수를 연상케 한다.

2024년 8월 8일 05시 43분, 여기저기서 산객들의 탄성이 터져 나오며 천왕봉의 일출이 시작되었다. 해변이나 다른 산의 산정에서 맞이하던 일출에 비해 태양의 크기는 더 작고 옹골차고 밝기는 수십 배는 더 밝고 강렬해 보인다. 이박 삼일 종주산행의 정점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지리산 제1경을 이렇게 목도하게 되니 감흥이 남다르다. 천왕봉에서의 해맞이가 누구나 경험할 수 없고 오죽 힘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맞이할 수 있다고 했을까!

두륜산, 방장산 등으로도 불리는 지리산은 한반도 남부 민족의 영산이라 여겨져 많은 이들이 찾아왔고 고려 때 이인로, 조선 때 이륙, 김종직, 남효온, 김일손, 조식, 유몽인, 조위한 등은 지리산에 관한 시문도 남겼다.

사림파의 영수였던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함양군수로 재직하던 1472년 음력 8월에 조위, 유호인 등과 함께 5일간 지리산을 유람하고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천왕봉에 오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새벽녘에 해가 동녘에서 솟아오르려 하자 노을이 영롱하게 빛났다. 일행 모두 내가 매우 지쳐서 재차 천왕봉에 오르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나는 '여러 날 동안 날씨가 계속 흐리다가 갑자기 맑게 개니 하늘이 나에게 베풀어주는 것이 많구나. 지금 천왕봉이 지척에 있는데 힘써 다시 올라보지 않는다면 평생 답답한 마음을 끝내 말끔히 씻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고서 석문을 통과하여 위로 올라갔다. 성모묘에 들어가 다시 술을 올리고 사례하기를 '오늘 천지가 맑게 개고 산천이 확 트인 것은 진실로 신명의 은택입니다. 참으로 매우 기쁘하며 감사드립니다'라고 하였다. 아무리 높이 나는 기러기나 고니라 할지라도 우리보다 더 높이 날 수는 없을 것이다."
_심경호의 ≪산문기행≫ '김종직의『유두류록(遊頭流錄)』中  

일출이 끝나고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이리저리 오가며 산정이 선사하는 장관을 만끽하며 욕심껏 사진도 남겼다. 하산을 채근하며 B와 함께 앞서 길을 잡는 M과는 달리 향도를 맡아 산행을 이끌던 H는 사진에 집착하며 한참 더 나를 붙잡아 둔다. 평소처럼 날씨, 코스, 교통편 등을 주도면밀하게 살피는 산행대장 M은 대원사로의 긴 하산 길과 원지에서의 서울행 차편 등을 감안하여 길을 채근했을 터이다.

천왕봉에서 6시경 출발했다. 중봉, 써리봉, 치밭목대피소 등을 거쳐 유평리로 이어지는 약 12km의 하산길 등로가 기다리고 있다. 당초 나는 천왕봉에서 5.4km 거리로 짧은 코스인 중산리로 내려가는 소위 '성중종주'를 생각했으나, 하나같이 급경사를 걱정하며 보다 느슨한 경사의 '성대종주'를 원한 동행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주 능선의 여러 봉우리들 보다 볼거리가 많지 않고 길고 지루하기 때문인지 대원사 코스에서 눈에 띈 산객은 같은 방향의 부자(父子) 산객 한 팀과 무제치기 폭포 부근에서 올라오는 만난 산객 두 분이 전부였다.

가파른 비탈을 치고 오르자 해발 1,874m로 지리산 제2 고봉인 중봉은 정상 턱밑에서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터를 내어준다. 중봉을 지나자 강렬한 태양이 따갑게 내려쬐고 이제나저제나 하는 써리봉은 나타날 줄을 모른다.

종주산행의 말미는 늘 악전고투다. B는 지난 유월에 다녀온 설악산 공룡능선 종주 산행 때 양폭대피소에서 천불동계곡을 거쳐 신흥사로 이어지는 하산길을 천신만고 끝에 내려온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나는가 보다. 설악산을 오르다 보면 아름다움을 볼줄 아는 안목이 생기고, 이처럼 지리산 종주 산행을 한 번이라도 해보면 여리던 심지(心志)도 더욱 단단하고 굳세어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멀리 구름이 타고 오르는 천왕봉의 장관을 다시 한 번 더 보여주는 써리봉을 지나고 치밭목대피소를 향해 매진한다. 치밭목대피소를 목전에 둔 등로 옆 듬성듬성 자리한 바위 위에 걸터 앉아 숨을 골랐다. 이정표가 해발 1,623m라고 알린다. 천왕봉에서 출발한 지 2시간 20분이나 지났는데  고도는 고작 300m 가량 낮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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