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 산 기행

지리산에 안겨서 별을 품다(III)

인산(仁山) 2024. 8. 21. 12:46

벽소령대피소에서 산행 이튿째 날을 맞이했다. 작은 창틀이 뚫린 복층 구조의 목재 건물인 대피소 수면실은 많은 산객을 수용한 탓인지 열기로 잠을 설치게 했다. 자정 쯤 잠에서 깨어 바깥으로 나가서 서늘한 공기에 손으로 팔을 감싸며 잠시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을 눈에 담아 보았다.

새벽 세네 시부터 대피소 수면실 여기저기에서 짐을 챙기는 소리가 잠결에 들려온다. 2박3일의 여유로운 일정으로 급할 것이 없는 우리 일행은 느긋하게 여섯 시가 조금 넘어서 몸을 일으켰다. 아침을 준비해서 들고 7:35경 장터목 방향으로 길을 잡아 출발했다.  

오늘은 벽소령대피소를 출발하여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 촛대봉, 연하봉을 차례로 거쳐 장터목대피소까지 약 10km를 이동할 예정이다.

출발한지 얼마지 않아 뒤쪽에서 빠른 걸음으로 호기롭게 다가오는 젊은 산객 일행 세 분에게 길을 비켜주고 오버 페이스하지 않으며 진행한다. 금세 땀이 온몸을 적시는데, B 처럼 어제 입고 물에 헹구어 놓아 여전히 축축한 셔츠를 다시 입고 온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벽소령대피소에서 구(舊)벽소령길 이정표까지 1.1km는 기대하지 않은 흙길 등 평탄한 등로가 이어져 순식간에 지나왔다. 기실 구벽소령길은 1971년에 준공된 군사작전 도로로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신흥마을과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를 잇는 벽소령 종단도로였던 것이다. 1987년 국립공원공단 설립 후 벽소령대피소에서 이곳까지 구간은 폐쇄되고 현재는 자연회복 중이라는 안내문 설명이다.

벽소령대피소에서 출발한 지 1시간만에 해발 1,478m 덕평봉을 지나고, 08:50경 봉우리 아래 호젓하게 자리한 선비샘에 도착하여 앞서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H와 합류했다. 넓적한 바윗돌로 단정하게 단을 쌓고 대나무 파이프로 샘물이 흘러 내리게 한 샘은 그 이름처럼 단정하고 물맛도 청량하기 그지없다. 이 샘에는 그 이름에 대한 재미있는 유래가 아래와 같이 전한다.

"평소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살던 덕평골 화전민 이씨 노인이 죽어서라도 남에게 존경을 받고 싶어 자신을 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효성스러운 자식들은 그의 유언을 따랐고, 그로부터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샘터 물을 마실 때면 자연스럽게 허리를 구부려서 무덤에 절을 하는 형상이 되어 남들로부터 존경 아닌 존경을 받게 된 것이다."
_출처: 선비샘처 안내문

다시 몸을 추스리고 마음을 다잡아 길을 재촉한다. 힘겨운 산행 중 동행자와 서로 주고받는 격려의 말은 큰 힘이 된다. 이야기는 어쩌다가 학창시절 학폭과 체벌, 군 복무 시절 고참들의 괴롭힘, 직장 상사의 갑질과 하급자의 을질에 까지 미쳤다. 대학동창인 우리 일행은 하나같이 그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당해 본 세대이다. 갑질 당한 얘기에 빠져들어 잠시 가파른 비탈 등 험한 등로도 힘든 줄 모르고 올랐다.

끝이 없을 듯 치고 오르던 칠선봉으로 가는 비탈길 중간쯤 넓고 평편한 능선에 앞쪽으로 툭 트인 조망을 펼치는 전망대가 자리한다. 그 위에 자리한 '지리산 제일봉 천왕봉을 찾아보세요!' 제하의 안내판에 표시된 촛대봉, 영신봉, 세석평전, 연하봉, 장터목, 천왕봉, 제석봉, 중봉 등이 머리에서 잠시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밀려온 안개에 묻혀 버린다.

지리산은 면적 약 483km²로 경남 하동, 산청, 함양,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 등 3개도, 1개시, 4개군, 16개 읍ㆍ면에 걸쳐 있는 거대한 산군이다. 지리산 산행 중 잠시라도 정신을 팔다 보면,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어디쯤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우리 일행은 이번 종주산행에서 1,400미터가 넘는 봉우리 15개를 거쳐 가야 한다. 그래서인지 어떤 봉우리들을 지나왔고 앞으로 넘어야할 봉우리가 무엇무엇인지 헷갈리기 일쑤다.

해발 1,552미터 칠선봉 정상부에는 훤칠한 암봉들이 서로 널찍한 거리를 두고 군데 군데 자리하는데, H와 나는 그 이름처럼 덩치가 큰 암봉만도 일곱 개는 될 것이라는데 서로 맞장구를 쳤다.

칠선봉 정상부를 지나니 앞쪽에 낙남정맥의 출발점으로 도깨비 뿔처럼 생긴 암봉을 호위무사처럼 전면에 내세운 영신봉(靈神峰)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 봉우리가 만든 안부로 내려와서 영신봉의 뿔처럼 생긴 봉우리 좌측으로 휘돌아 난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올랐다. 앞쪽 멀리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는 능선과 오늘 하룻밤을 묵을 벽소령대피소가 눈에 들어와 반갑기 그지없다.

나무계단 길을 통해 뿔처럼 생긴 암봉을 휘돌아 거대한 바위들이 우뚝 우뚝 어우러져 여러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정상부로 올라섰다. 멀리 지나온 능선에는 안개구름이 산줄기를 타고 넘으며 뭉개구름을 하늘로 피워 올리고 있고, 앞쪽 능선은 호시탐탐 넘보는 구름을 막아서서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설악산이나 지리산 등 고산지대에서만 볼 수 있다는 산오이풀이 암봉 틈새 군데군데 뿌리를 내리고 붉그레한 꽃을 피운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봉우리 아래 등로 옆에 서있는 해발 1,652m 영신봉 표지석을 스쳐 지났다.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바라보며 세석대피소로 가는 능선을 내려서는 등로는 한결 활달하여 앞서 걷는 일행들의 웃음 섞인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정오 쯤에 세석대피소에 도착하여 점심을 들고 패트병에 물을 보충했다. 세석대피소의 샘터 샘물은 선비샘보다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도 그만이다. 샘터로 내려가는 입구의 이정표가 샘터 쪽 6km와 10km 지점에 각각 거림마을과 청학동이 있다고 알린다.

풀었던 배낭을 더디게 다시 꾸리고 있는 B와 진주서 오셨다는 노부부 산객과 마주앉아 얘기꽃을 피우는 M에 앞서 먼저 출발한 H를 뒤쫓아서 12:45경 세석대피소를 뒤로했다.

대피소 쪽에서 한참동안 뒤따라오는 M의 목소리를 들으며 촛대봉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석평전은 과거 산불로 훼손된 후 구상나무와 같은 침엽수림 아래 자라던 여러해살이풀인 호오리새가 여러 종류의 들꽃, 키작은 나무, 교목 등과 섞여서 가장 넓게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등로 옆에 씨앗 포집용 망태기를 쓰고 있는 야초들이 눈길을 끈다. 온몸이 햇빛에 드러나는 등로를 따라 걷자니 서늘했던 고원에서 한여름으로 다시 돌아온 느낌이다.

촛대봉 정상은 생태복원을 하기 위함인지 통로를 막아놓아 그 아래 쪽에 솟아 있는 암봉 위로 올라섰다. 암봉에서의 전망은 거칠 것 하나없이 사방이 트였고, 능선을 타고 넘는 서늘한 바람에 온몸을 적신 땀과 열기가 한꺼번에 날아가 버릴듯 기분이 상쾌하다.

촛대봉에서 삼신봉, 화장봉, 연하봉으로 이어지는 등로 또한 도처가 힘겨운 고비이다. 그 초입 우측 능선에 키작은 관목 숲 사이에서 흰 뼈대를 드러내고 있는 구상나무 고사목들이 기이한 경관을 그려내고 있다. 삼신봉을 지나 화장봉 위에 올라서니 연하봉이 더욱 가까이 다가섰고, 구름이 걷힌 천왕봉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을 펼쳐 보인다.

"세석고원과 장터목 사이 연하봉에는 청암절벽이 솟고 철따라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고사목과 어우러지고, 촛대봉 북사면의 한신계곡을 넘어온 운무가 이 봉우리에 잠시 머물면, 신선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날것만 같은 꿈같은 선경이 펼쳐진다."

연하봉은 지리산 제8경 연하선경을 묘사하는 내용 그대로의 장대한 풍경을 펼쳐보이며 산객의 눈길과 발길을 붙잡는다. 정상부에 피라미드처럼 생긴 암봉이 자리한 연하봉이 구상나무 숲 위로 우뚝 솟아 있고, 그 오른쪽으로 수평으로 길게 뻗은 능선 위에 장군총 무덤을 닮은 꽁초봉도 또렷이 모습을 보인다. M의 말에 따르면 옛 산객들이 힘든 산행 끝에 꽁초봉에 올라 꽁초 담배를 피우면서 감상하는 주변 풍경이 가히 일품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연하선경은 그 속에 들어가서 보아야  그 진면목이 보인다는 M의 채근에 일행은 아쉬운듯 촛대봉을 뒤로하고 연하봉으로 향한다. 연하봉에 올라서니 제석봉과 천왕봉이 더욱 선명하고도 눈앞으로 가깝게 다가왔다. 천상의 화원처럼 키가 작은 낮은 관목숲 사이에 꽃이 만발한 능선 사이로 난 등로를 따라 15:40경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했다. 침상을 배정받고 배낭을 내렸다.

힘겨웠던 첫날에 비해 이튿날은 약 12km 8시간에 걸친 적당한 산행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피소로 천왕봉 일출산행의 전초기지인 이곳에 안착하여 피곤을 풀며 내일 산행을 준비할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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