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봉 정상까지는 가파른 비탈이 계속 이어진다. 등로 옆으로 고사목들이 얼굴에 홍조를 띤 시골 처녀처럼 생긴 동자꽃 군락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광경이 스쳐 지난다. 산정에서 내려오는 두 젊은 여성 산객에게 산정 위로 비둘기 날개처럼 펼쳐진 구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주고 발길을 재촉했다.
높게 떠오른 태양은 뜨겁고 달아오른 몸은 땀이 비오듯 하지만 수목 사이로 난 그늘진 등로를 지날 때면 선선함이 느껴진다. 반야봉 정상은 그 턱밑에 가파른 나무 계단을 내놓으며 산객을 맞아준다.
복슬강아지의 꼬리처럼 생긴 산오이풀이 반기는 산정의 저쪽 끝에서 반야봉 정상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등로 쪽으로 무채색 구름이 노고단을 넘어서 천군만마처럼 능선을 집어삼키며 엄습해 와서 제3봉인 반야봉은 넘보며 눈 아래 운해를 펼쳐 놓았다. 천왕봉 쪽 능선은 피어오른 흰 뭉게 구름이 한 폭 그림을 펼쳐 보이며 손짓한다.
노루목으로 되돌아 내려와서 삼도봉까지 약 1km 이어지는 바위 너덜길에 발목과 무릎이 힘겨워한다. 정상 아래로 마중나온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날라리봉으로도 불리는 삼도봉에 올라섰다. 넓고 평평한 바위 봉우리 위에 한 면에 각각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라고 적힌 삼각뿔 형 표지석이 놓여 있는 삼도봉 정상은 이 지점이 3개 도의 경계가 맞닿는 곳임을 알린다. 여름이 아직 물러나지 않았다고 시위하듯 고추잠자리 떼가 어지럽게 군무를 추고 있다.
앞에 화개재 고개와 토끼봉이 기다린다. 화개재로 내려가는 계단은 땅속으로 꺼질듯 끝이 없을 듯 아래로 이어진다. 등로 옆 넓고 평평한 능선에 잡초 사이로 원추리 등 들꽃이 만발한 화개재를 지난다. 이곳 화개재는 장터목, 벽소령과 더불어 각각 전라 경상 충청의 내륙과 삼한시대 때부터 장터 구실을 했다는 온갖 물산의 집결지 화개(花開) 장터를 연결하는 교역의 통로 역할을 오랫동안 담당해 왔을 것이다.
눈에 익숙한 동자꽃은 등로 주변에 지천이고 이질풀, 벌개미취, 꽃며느리풀꽃 등도 가끔씩 눈에 띈다. 삼도봉을 타고 넘어며 뒤쫓아 오는 구름이 무거워진 발길을 재촉했다.
무성한 구상나무와 전나무 숲 사이로 급경사 등로가 길게 이어지는 토끼봉 오르는 길은 버겁기만 하다. 쉬지 않고 토끼봉으로 먼저 직행한 H의 체력에 혀를 내두르며 나머지 일행은 그 중턱에서 휴식을 취했다. 등로 주변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는 동자꽃을 지개꾼 삼아 비탈을 오르면 좋겠다는 어쭙잖은 생각이 들 지경이다. 화개재부터 40여 분을 토끼봉 비탈과 씨름하며 그 위로 올라서니 온몸은 땀으로 목욕을 한듯 흠뻑 젖었다.
해발 1,534m 토끼봉에서 휴식을 취하며 기력을 충전했다. 시각은 정오가 지나 오후 1시로 향하고 우리 일행은 3km 거리의 연하천대피소로 향한다. 임걸령 샘에서 물을 확보하지 못해 수통에서 간당거리는 물이 신경을 그슬리며 발길을 재촉한다. 앞서 치고 나아가는 동행을 쫓아가지만 B와 나는 걸음이 자꾸 뒤쳐지며 걷다가 쉬기를 반복했다. 명선봉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에 털썩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해는 구름 속에 숨었고 바람은 간간이 불어 이렇게 앉아 있는 것 만으로도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발 1,583m 명선봉 너머에 숨어 있을 대피소에 먼저 도착했다는 M의 연락에 B가 물이 간절하다는 회신을 하고 발을 옮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하천대피소에서 물병을 들고 명선봉까지 되돌아 올라온 M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생명수를 만난듯 갈증을 달래고 나무계단을 따라 400여 미터를 내려가서 연하천대피소에 닿았다. 뒤돌아보니 고통스럽게 넘어온 명선봉 위로 그림처럼 목화꽃 같은 새하얀 뭉게구름이 걸려 있다.
다른 대피소에 비해 샘물 맛이 좋기로 소문난 연하천대피소는 노고단고개에서 10.5km, 천왕봉까지 15.4km를 남긴 지점에 위치하여 정통적인 2박 3일 지리산 주능선 종주의 첫 숙박지로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연하천대피소에서 한 시간가량 머물며 물을 끓여 B가 준비해온 건식 즉석 비빔밥으로 늦은 점심을 들며 이른 새벽부터 10시간가량 이어진 긴 산행의 피로도 조금 누그려뜨렸다.
지친 다리는 무겁기만 한데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으니 한발 한발 걷다 보면 오늘의 목적지에 닿을 것이다. 벽소령대피소까지의 거리가 3.6 km라는 이정표를 확인하고 15:40경 연하천대피소를 뒤로한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700m를 전진하자 지도 앱에 삼각고지로 표기된 지점에 음정마을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제 형제봉을 넘어서면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벽소령대피소가 나올 것이다.
해발 1,452m 형제봉 봉우리 위에 도착할 즈음 어느 방향에선가 시나브로 밀려온 안개구름이 주위 숲을 뒤덮으며 시야를 가두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위가 자리한 정상부를 지나 내리막 비탈을 조금 내려오자 거대한 암벽 두 개가 등로 옆을 가로막고 우뚝 솟아 있다. 필시 이 두 개의 바위를 두고 형제봉이라 이름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형제봉을 넘어서며 금세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했던 벽소령대피소는 한 시간 가량 더 절치부심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17:58경에 홀연히 닿았다.
노고단과 천왕봉 사이 중간 쯤에 위치하여 지리산 주 능선의 허리에 해당하는 이 대피소는 수용 가능인원 63명으로 개별난방이 되는 수면실, 조리실, 급수대, 순환수세식 화장실 등을 구비하고 있다. 아무리 시설이 좋다고 해도 대피소에서는 비누나 치약을 사용할 수 없고 세수할 곳도 없어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수습하여 하루 저녁을 넘기는 일이 고역이다. 수면실을 배정받고 배낭을 내린 후 물 티슈로 몸과 머리의 땀을 닦아 내고 옷을 갈아 입은 뒤 저녁을 준비하여 고픈 배를 달랬다.
일행은 다들 각기 준비해온 음식물을 서로 먼저 소진하여 배낭 무게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줄여 보려 안달이다. 가져온 음식물의 포장지 등 쓰레기는 되가져 가야하고 갈아 입고 벗은 옷가지는 땀에 젖어서 배낭의 무게는 좀체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저녁을 든 후 잠시 수면실에 몸을 뉘였다가 밖으로 나가 어두워진 서쪽 하늘에 가늘게 뜬 초승달과 온 하늘에 총총 빛나는 별을 눈에 가득 담았다. 오후 9시가 되자 대피소 수면실은 소등이 되었다. 침상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가 멀어지는 듯 꿈나라 속으로 빠져들며 길고 길었던 산행 첫날이 지나갔다.
'아름다운 우리 산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에 안겨서 별을 품다(V) (0) | 2024.08.21 |
---|---|
지리산에 안겨서 별을 품다(IV) (0) | 2024.08.21 |
지리산에 안겨서 별을 품다(III) (0) | 2024.08.21 |
팔봉산 어게인 (2) | 2024.08.21 |
지리산에 안겨서 별을 품다(I) (0) | 2024.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