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 산 기행

팔봉산 어게인

인산(仁山) 2024. 8. 21. 12:39

장마의 끝자락이다. 홍천의 팔봉산 산행을 하기로 의기투합한 친구들이 서울 동쪽 끝에서 몰아온 차에 하남에서 올라탔다. 산과 구름이 어우러져 두루마리 수묵화를 펼쳐 놓은 듯한 장관에 감탄하며 미사대교를 건너서 경춘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잠시 들른 가평휴게소는 너른 주차장이 빈자리가 없이 차량으로 가득 찼고 휴게소 건물 내부는 발 디딜 틈이 없이 인파로 북적인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여름휴가가 시작되었나 보다. 시간 반 만에 도착한 팔봉산관광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행 채비를 했다.

 

나는 M과 함께 오 년 전에 팔봉산 산행을 한 번 했었고 H와 B는 처음이라고 한다. 천변 도로 옆으로 선홍빛 꽃 봉오리를 활짝 피운 무궁화가 도열해 있고, 너른 자갈밭이 펼쳐진 강변에서 구명복 차림의 사람들이 물놀이에 여념이 없다. 강 너머로 무성한 숲 짙은 녹음을 두른 여덟 개 봉우리 팔봉산이 아담한 듯 의연히 자리하고 있다.

 

홍천강이 휘돌아 흐르는 여덟 번째 봉우리 제8봉 쪽에서 상류의 제1봉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강 위를 가로질러 놓인 팔봉교를 건넌다. 장마의 끝자락 불어났던 강물은 제법 수위가 낮아졌을 터이지만 유속은 제법 빨라 보인다. 다리 입구의 돌비석이 1981년 5월 아들 딸 소풍 준비를 위해 광판시장에 다녀오던 주민 여덟 분이 세찬 물결과 돌개바람에 나룻배가 뒤집히며 유명을 달리했고, 그 이듬해 6월에 이 다리를 놓았다는 슬픈 사연을 알려준다.

 

팔봉산 매표소 옆에 자리한 팔봉산 안내판 위에는 "100대 명산 팔봉산"이라는 큰 글씨가 홍천 9경 가운데 제1경이자 대한민국 명산의 반열에 자리한 팔봉산의 위상을 알려 준다.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에 모습을 보이는 팔봉산은 일찍이 세종실록 46권 세종 11년(1429) "국가에서 행하는 치제의 예를 따라 지정한 전국의 영험한 25개 명산 중 하나"라고 기록되었다고 한다.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기념하고 산의 가치와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 산림청이 그해 10월에 선정 공포한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린 것도 일찍이 그 진면목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내소 앞 등로 입구에 세워져 있는 네댓 개 목재 남근석이 눈길을 끈다. 암벽으로 이루어진 팔봉산 봉우리 곳곳은 추락 위험이 있어 20여 년 전부터 등산사고가 빈발했다고 한다. 사고를 방지할 뚜렷한 묘책이 없었는데, 이 산의 너무 강한 음기를 다스려야 한다는 어느 노인의 말에 따라 세웠다는 안내문 설명이다.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경복궁 앞에 해태(獬豸) 상을 세운 것이나 호랑이, 개, 닭 등의 그림을 대문이나 부엌 등에 붙인 것도 나쁜 기운을 막고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안내소에서 입장료 1인당 1.5천 원을 지불하고 등나무 터널을 지나 제1봉 밑자락으로 접어들며 산행을 시작한다.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처럼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뛰어든 듯 홀연 숲이 무성한 팔봉산의 첫 봉우리로 오르는 가파른 비탈이 앞을 막아선다.

 

한참 동안 암벽 위로 놓인 반듯한 계단을 오르고 등로 위로 뿌리를 드러낸 참나무 숲을 지나고 밧줄을 잡고 암벽을 올랐다. 몸에서 땀이 배어 나올 즈음 제1봉은 그 중턱에 멀리 금학산(金鶴山) 등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조망대와 함께 한줄기 바람을 산객에게 내어준다. 금학산은 '금빛 학이 날개를 펴고 춤추는 형상’으로 그 정상에 서면 홍천강이 마을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모양이 태극을 닮았다는 '수태극(水太極)'의 장관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들머리로 들어선 지 40여 분 만에 큰 바위 위에 '팔봉산 1봉'이라 적힌 무릎 높이 크기의 앙증맞은 표지석이 자리한 제1봉에 올라섰다. 아래에서 바라볼 때 아담해 보이던 산이 실제로 올라보니 만만찮다는 B의 말처럼 여덟 개 바위 봉우리를 가진 팔봉산은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제법 위세로운 산이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올라선 첫 봉우리는 사방으로 특 트인 조망을 내놓으며 적지 않은 쾌감을 안겨 준다.

 

급전직하 암벽에 평행봉처럼 길게 설치된 철제 안전 펜스를 양손으로 잡으며 제1봉과 제2봉 사이 안부로 내려갔다. 모자 창에서는 벌써 땀방울이 비 오듯 떨어진다. 짧은 안부 지나고 2봉으로 오르는 길목 한편에 "2봉 가는 길은 암벽구간으로 위험하니 안전한 우회 등산로를 이용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보인다.

 

바위에 박힌 디귿자 철심을 딛으며 암벽 위에서 아래로 늘어뜨려 있는 밧줄에 의지해서 2봉으로 오르는 서스펜스에 더위는 느낄 새도 없이 멀찍이 달아난 듯하다. 해발 372.4미터로 팔봉산의 최고봉인 제2봉에는 산신당과 삼 부인당(三婦人堂)이 자리하는데, 삼 부인당 벽에 붙은 설명문이 이 당집에 대한 궁금증을 다소 해소해 준다.

 

"이 당집은 400여 년 전인 조선 선조(1590년대) 때부터 팔봉산 주변 사람들이 마을의 평온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며 액운을 예방하는 당굿을 해 오는 곳이다. 팔봉산당산제는 지금까지 유일하게 전승되어 오는 부락제로서 매년 음력 3월 보름과 9월 보름에 전통 굿과 제사를 지내면서 나라와 백성이 평안하고 관광객이 산과 강에서 무사안녕하기를 축원한다."

 

마침 삼부녀 초상화가 걸린 당집 안에는 삼 부인당의 당주와 그녀로부터 신내림을 받은 무당과 박수 등 네 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주로부터 삼부녀에 얽힌 전설을 듣고 금년 4.21-23일 3일간 열렸던 당산제 팸플릿도 하나 건네받으며 박수무당이 손수 타서 주는 커피도 한 잔 드는 뜻하지 않은 호사 누렸다.

 

팸플릿은 홍천문화재단 주최, 한국민속문화예술진흥원과 팔봉산당산제추진위 주관, 홍청군과 홍천군 의회 등 후원으로 개최된 당산제가 "국태민안 시화연풍(國泰民安 時和年豊)"의 모토 아래 당맞이 및 당산제례, 굿거리와 전통놀이 공연, 용신 넋 건지기, 삼 부인당 배웅 등으로 진행되었다고 알린다.

 

당집 옆 홍천강변 쪽 철제 전망대는 홍천강과 그 주변 툭 트인 전망을 선사한다. 앞서 3봉 정상부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 두 친구를 클로즈업하여 스마트 폰에 담고 H와 함께 발길을 옮긴다.

 

2봉과 3봉 사이 안부에는 홍천강변으로 내려가는 하산로가 나있다. 송곳처럼 뾰족한 바위가 솟아 있고 수직의 아찔한 암벽 아래 홍천강이 닿을 듯 굽이쳐 흐르는 3봉에 올라서니, "팔봉산은 태백산 보다 기(氣)가 강한 곳"이라던 삼 부인당 당주의 말을 새삼스레 실감하게 한다.

 

좁은 철계단을 따라 3봉과 4봉 사이 안부로 내려서자 철제 다리와 좁은 바위 틈새를 통과하는 '해산굴'의 두 갈래 갈림길이 나온다. 철계단으로 올라 배낭을 4봉 봉우리에 두고 되돌아온 H의 뒤를 이어 몸을 비틀고 용을 쓰며 두 암벽 사이 좁은 틈새 위쪽에 있는 좁은 바위틈을 통과했다.

 

안내문이 이 굴은 통과하는 과정의 어려움이 산모가 아이를 낳는 고통을 느끼게 한다 하여 해산굴이라고 부르며, 여러 번 통과할수록 무병장수한다는 전설이 있어 일명 '장수굴'로도 불린다고 설명한다. 작은 산이지만 홍천 9경의 제1경 답게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4봉을 뒤로하고 가파른 철계단을 따라 날카롭게 솟아 있는 5봉 위에 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암봉들이 울창한 숲 위로 불쑥불쑥 솟아 있는 모습이 마치 등어리에 골판을 치켜세운 스테고사우르스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 기이하고도 독특하다. 봉우리 하나를 지날 때마다 일행이 함께 표지석을 배경으로 손가락으로 봉우리 숫자 모양을 하며 인증 숏을 남기는 재미도 남다르다.

 

5봉 턱밑 너럭바위에 모여 앉아 홍천강을 굽어보며 목을 축이고 바나나 귤 주먹밥 등으로 허기를 달래며 다음 주에 결행할 이박삼일 지리산 성중(성삼재~중산리) 종주산행에 대한 기대와 의견을 나누었다. 상창고개, 신당고개 등 한강기맥의 구간별 기점과 비발디파크 등 주변 명소들의 방향도 가늠해 보지만 지도 앱으로 확인해 보면 어림짐잠은 빗나가기 일쑤다.

 

 

멋진 노송 아래 바위 위에 표지석이 놓인 6봉을 지나고 7봉으로 가는 등로 오른편으로 강 건너 차를 세워둔 주차장이 눈에 들어온다. 각기 독특한 재미를 선사하는 암봉들을 오르내리다 보니 시나브로 산행을 시작한 지 두 시간이 훌쩍 흘렀다.

 

7봉에서 멀찍이 로 떨어져 앉아 있는 8봉으로 가는 등로는 팔봉산 등산로 코스 중 가장 험하다. 양쪽에 설치된 철봉 가드를 잡고 평행봉 하듯 가파른 암벽 비탈을 타고 땅 아래로 깊숙이 꺼지듯 안부로 내려갔다. 안부에서 8봉으로 오르는 철계단은 코가 계단 발판에 닿을 듯 가파르다. 안부에 안전사고가 자주 일어나니 산행 경험과 체력이 부족한 사람이나 노약자 등은 7, 8봉 사이 안부의 하산길로 내려가라는 안내문이 서있는 까닭이다.

 

마지막 8봉에서 홍천강변으로 내려가는 하산길에 제 철을 만난 매미의 떼창 소리와 강 건너 도로의 차량 소음이 서로 다투듯 귀청을 때린다. 암벽에 박힌 철심과 가드를 잡고 150여 미터를 내려가는 급전직하 하산 등로는 흡사 암벽등반 코스로 접어든 기분이 들게 한다.

 

홍천강 물놀이장 맞은편 8봉의 밑자락으로 내려서서 강변 등로를 따라 1봉 쪽 들머리이자 날머리로 거슬러 올라가며 팔봉산 산행을 갈무리한다. 동료들은 하나같이 세 시간 남짓 짧았지만 인상 깊은 산행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주차장으로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은 후 팔봉산관광지 관리소의 무료 구명조끼를 빌려 입고 홍천강에 뛰어들어 몸을 담갔다. 삼복더위가 일거에 말끔히 씻겨 나갈 듯 뼛속까지 시원한 기운이 스며든다. 한 때 한 순간 한 점 시름도 없이 동심의 냇가로 거슬러 가서 뛰놀던 마음을 추슬러 귀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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