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시경 치밭목대피소에 도착해서 그 아랫 쪽 100여미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샘터에서 간단히 건식 식사를 하고 유평리 쪽으로 출발했다. 대피소의 하산길 등로 옆에 서있는 이정표가 대원사까지 7.7km, 대원사주차장까지 9.8km라고 알린다.
이정표를 보고 등로에서 84m 떨어져 있다는 무제치기 폭포로 달려간 H는 뒤처져 따라오던 M과 B와 거의 동시에 폭포 쪽에서 되돌아왔다. H가 찍은 3단 너른 폭을 타고 내라는 폭포 동영상은 호쾌하고 시원스럽기 그지 없다.
마음을 다잡고 계곡 옆으로 난 너덜길을 오르내리며 걷는 길 땀은 비오듯 쏟아지며 눈으로 흘러들어 눈물인지 땀인지 구분이 가질 않을 지경이다. 계곡은 등로 아래 멀찍이서 물소리만 요란할 뿐 좀체로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 비탈길 암벽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에 쪽세수로 땀을 씻어 본다.
앞서 간 H가 유평리 마을에 도착하기 약 1km 전쯤 등로 옆 계곡에 몸을 담그고 우리에게 내려오라고 손짓한다. 주저없이 계곡으로 내려가서 발과 몸을 담그고 땀에 젖은 옷을 갈아 입었다. 한결 몸이 가벼워 지고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듯하다.
유평마을이 가까와지자 매미 떼창이 계곡 물소리와 함께 요란하다. 천왕봉에서 길게 뻗어 내린 산줄기 끝 유평마을 후면으로 내려서며 길고도 길었던 2박3일 지리산 종주산행을 마무리 한다.
가파른 경사면에 자리한 민박 집 입구에 걸려 있는 '무릉도원'이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자락에 은둔하여 학문을 몰두했던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지리산을 사랑해서 지리산을 무릉도원이라 하며 17번이나 올랐다고 한다. 남명은 "선을 따르기는 산을 오르듯이 어렵고 악을 따르기는 무너져내리듯 쉽다."고 했다.
실로 산을 오르는 일은 선(善)을 행하는 일처럼 어렵고도 힘들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을 메고 시시각각 짓눌러 오는 고통을 견뎌내며 지리산 주 능선의 수많은 비탈을 오르내리는 산행은 오죽하랴. 지리산 산행을 하듯 세상을 대하면 세상의 어떠한 나쁜 유혹이나 고난도 감당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인들이 즐겨 산을 찾은 이유를 갈파한 어느 작가의 글이 마음에 닿는다.
"오늘날에는 지리산 종주 및 등반 코스가 선인들의 유람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아졌다. 그러나 그 모든 길들에서 선인들이 산에 올라 정신세계를 확충하였던 그런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리라.
그렇기에 외줄기 길이 그리울 때가 있다. 산수를 그린 그림에 외줄기 길이나 외나무다리가 종종 나오는 것은 다 까닭이 있는 것이다."
_심경호 ≪산문기행≫ 중
유평마을로 내려섰다. 앞장 서서 걷던 H가 히치하이킹을 해서 대원사길을 따라 유평마을에서 대원사로 향하는 트럭을 불러 세웠다. 인심 좋은 기사분을 만난 덕에 우리 일행은 지칠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대원사 버스정류장까지 약 4km를 도보로 이동하는 고역을 피할 수 있었다. 때마침 B는 완전히 떨어져 너덜대는 등산화 한 쪽 밑창을 뜯어 버리며 트럭을 얻어 타게 된 것이 천운이라며 안도한다.
대원사 버스정류장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원지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왔고, 짐칸에 배낭을 넣고 버스에 오르니 모든 근심이 날아간 듯 몸과 마음이 가벼워 졌다. M은 예매해 두었던 15:50 원지 발 서울남부터미널 행 버스표를 14:40 출발편으로 바꾸었다.
원지(院旨)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 입고 정류장 건너편 식당에서 콩나물국밥으로 허허로워 하는 속을 달랬다. 국밥에 '지리산 단성 생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니 달아올라 식을 줄 모르던 몸의 열기가 일거에 날아가 버린 듯하다.
지리산 종주산행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로망이라고 한다. 때때로 환희와 안도의 순간도 있지만 길고 지루하고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지리산 종주산행을 마치는 순간 대부분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마음 먹기 일쑤다.
그렇지만 한 번 지리산 종주산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로망을 이룬 것은 아닐 것이다. '실현하고 싶은 소망이나 이상'이라는 말뜻처럼 로망(roman)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꿈꾸고 체험하고 싶어하는 미래희망형이기 때문이다.
가물거리던 청년시절 지리산 종주산행의 기억을 아쉬워하며 30여 년 만에 다시 지리산 종주산행을 결행한 이유이기도 하다. 산행을 함께한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또 다른 로망을 함께 하길 고대한다. The End.
'아름다운 우리 산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선 가리왕산 아라리 (0) | 2024.08.23 |
---|---|
방태산, 원시의 숨결 (0) | 2024.08.23 |
지리산에 안겨서 별을 품다(IV) (0) | 2024.08.21 |
지리산에 안겨서 별을 품다(III) (0) | 2024.08.21 |
지리산에 안겨서 별을 품다(II) (0) | 2024.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