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내내 계속된 가뭄에 저수지가 마르고 논바닥은 타들어 갔다. 오랜 가뭄 끝에 폭우로 시작된 장마가 또다시 농민들의 애간장을 까맣게 태워놓고 팔월로 들어서서야 물러갈 채비를 한다. 무을(舞乙), 고향에 대한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보니 네 해 만에 찾아가는 길이다.
도로변 첩첩 산들이 비를 잔뜩 머금고 능선을 타고 넘으려는 구름과 버겁게 씨름하고 있다. ‘부산에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하나 너도 이제는 없는데….’ 라디오의 허스키한 노래 가사가 마치 내 마음속에서 구름처럼 일었다 사그라지기를 반복하는 생각을 들여다본 것 같다.
여주에서 들어선 중부내륙 고속국도는 장호원, 충주, 단양, 문경, 상주를 거쳐 선산을 지날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서울과 충청, 경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고속도로였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수많은 도로가 뚫리고 닦이고 놓여 전국이 말 그대로 사통팔달이다. 이제 고향은 거리 때문이 아니라 생활에 쫓기고 마음이 여유를 잃어 멀어져 버린 존재가 되었다.
단양과 문경의 경계를 이루는 소백산 줄기는 높고 험준하다. 그 줄기를 관통하는 터널을 여러 개 빠져나와 한참을 더 달리니 넓은 상주 평야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선산 휴게소 ‘로컬 푸드 행복장터’엔 인근에서 생산된 자두, 복숭아, 포도 등 갓 수확한 과실과 도라지 즙, 곶감 등 농산물 가공품들이 진열대를 빈틈없이 채우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새색시 볼처럼 붉게 잘 익은 복숭아 두 상자를 사서 트렁크에 실었다.
선산 IC를 빠져나오면 국내 최고 높이의 국보 제130호 신라 시대 오층 석탑이 있는 죽장사와 사육신 중 한 분인 단계 하위지 선생의 묘소가 있는 죽장리다. 태백 황지에서 발원하여 먼 길을 달려온 낙동강이 거친 숨을 고르며 흘러드는 감천(甘川)을 품는 곳.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과 순교자 이차돈의 전설을 간직한 신라 최초의 사찰 도리사,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신검의 최후 격전지 태조산, 려말 충신이자 영남사림의 학통을 세운 야은 길재 선생의 출생지 등 이곳 선산은 삼국시대 이래 수많은 역사와 유적을 남겼고 걸출한 인물들을 길러냈다.
그 북서쪽에 위치한 무을은 연악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낙동강을 등지고 미모산과 광덕산이 이웃 고을 김천과 경계를 이루는 길쭉한 골짜기에 안겨 있다. 하나뿐인 68번 지방도로를 따라 초가집 처마에 둥지를 튼 제비집처럼 여러 마을이 옹기종기 들어앉았다.
지형이 두 다리를 쭉 뻗고 춤추며 나는 새를 닮아 ‘춤새’로도 불린다. 무을의 초입 폐교된 무이 초교에 금오 민속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잠긴 대문 너머로 장승 서넛이 잡초에 덮인 운동장을 쓸쓸히 지키고 있어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면내(面內) 세 곳 초등학교에서 한 해 백여 명 넘게 중학교로 진학하던 우리 때와는 달리 지금은 초등학교는 하나만 남고 그나마 졸업생이 채 열 명도 안 된다니 안타깝다. 장터마을 약국과 정육식당은 사라졌고 정류소, 우체국, 농협과 부속 매장, 경찰지서 등 세월이 내려앉은 낯익은 건물들은 어릴 적 보던 때와는 달리 너무나 낮고 낡아 안쓰럽다.
반갑게 손을 잡으며 음료수를 건네고 가족들 안부를 묻는 정류소 상점 아주머니 모습도 할머니로 변해 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부 산소에 올릴 소주와 대구포를 집어 들고 지폐를 내밀자 ‘내비 도여’라며 한사코 물리쳐 손을 부끄럽게 한다.
복숭아 상자를 하나씩 들고 정류소 집 바로 앞 당숙모와 뒷골목 육촌 형님 댁도 차례로 들렀다. 골목마다 아이들 노는 소리가 넘치던 고향마을엔 매미 울음소리만 요란하게 울린다. 도회지로 떠나온 지 삼십 년이 넘어 옛 집은 허물어져 없어지고 그 터에는 대나무 숲이 무성하다.
동네 뒤 야산 조부 산소로 가는 길이 호젓하다. 명절이나 기일 때면 부친을 따라 형제들과 함께 제주(祭酒) 주전자와 음식을 챙겨 들고 오르던 길이다. 한여름을 지나온 할아버지 묘소는 비교적 말끔하다. 군데군데 갓 뿌리내린 도토리나무와 아카시아를 뽑고 잡초를 베었다.
혼례를 올리자마자 입대한 자식을 찾아 진해 해병대 훈련소로 면회를 가셨다가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기차역에서 자대로 향하는 병사들 틈에 낀 아들 얼굴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더라는 할아버지. 당신은 자식 걱정에 애를 끓이다 속병으로 돌아가셨고, 선친은 두 주일이 지난 ‘부친 별세’ 전보 쪽지를 들고 고향으로 달려왔더란다. 당신들이 헤쳐 온 애처롭고 회한에 사무쳤을 삶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온다. 준비한 포와 술을 상석에 올리고 재배하며 명복을 빌었다.
수다사(水多寺) 초입 상송 저수지엔 강태공들이 듬성듬성 간격을 두고 앉아 한가로이 세월을 낚고 있다. 저수지 옆 그늘 막은 한낮 태양을 피해 더위를 식히려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차지했다. 수다사 뒤편 연악산과 수선산 위 하늘은 연푸른색으로 빛나고 새하얀 뭉게구름이 높게 피어올랐다.
학창 시절 걸어서 가던 소풍의 단골 목적지 수다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때 진감국사가 세운 천년 고찰로 동네 입구에서 차로 금방 닿았다. ‘연악산 수다사’ 현판이 달린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앞마당으로 난 어른 키 높이의 돌계단을 올랐다. 마당 한 편에 수령 삼백 년 배롱나무가 무성한 가지마다 앙증맞은 붉은색 꽃을 피워냈다. 사십 년 전 까만 교복 차림으로 소풍 왔던 소년을 잊지 않은 듯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이 사찰은 수만 명의 승속이 참여한 관음 법회를 여는 등 한때 번영을 누린 적도 있었지만, 수차례의 화마와 수해에 시달려 현재는 대웅전, 명부전, 그리고 요사채만 겨우 건사하고 있다. 국보 제1638호 영산회상도와 경북 유형문화재 제139호 명부전 지옥도 등 남아있는 유물들이 사라져 버린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대웅전을 홀로 지키고 있는 아미타여래가 쓸쓸해 보인다.
1649년 이곳에서 함께 조성된 협시보살 대세지보살상과 관음보살상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선산 원각사 등으로 각기 뿔뿔이 흩어졌다니 쓸쓸함이 애잔함으로 바뀌어 다가온다. 마루 아래 신발이 가지런히 놓인 요사채에서 보살 네 분이 찻잔을 앞에 놓고 담소하고 있다. 반가운 인사와 함께 권하는 차(茶)를 사양하고 명부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연악산(淵岳山)으로 향했다.
평소 집 주위의 이름 있는 산들은 두루 다녔지만 정작에 고향의 산은 찾아보지 못한 것이 갚지 못한 빚인 양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던 터였다. 긴 가뭄에도 수다사 계곡은 그 이름처럼 물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계곡을 끼고 연악산으로 오르는 임도는 승천하는 용처럼 이웃한 수선산 자락을 휘돌아 고도를 높여간다. 봉황이 깃든다는 오동나무 고목이 임도 변을 따라 넉넉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늘어섰다. 무성한 드렁칡은 능선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임도를 넘어 넝쿨을 뻗었다.
매년 버섯축제가 열리는 고장답게 흡족히 내린 비에 제철을 만난 버섯이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었다. 버섯 내음이 후각 깊숙이 각인해 놓았던 배고팠던 시절 쌉싸름하고 아린 기억의 조각들을 자극하며 들쑤셔 놓는다. ‘펑 펑 펑’ 멀리 산 아래에서 간간이 멧돼지, 고라니, 토끼를 쫓는 공포(空砲) 소리가 들려오고, 수선산 능선 너럭바위 절벽 위에 올라서니 이웃 고을 낙동과 옥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선산을 지나서 평탄한 능선을 걸으며 숨을 고를 즈음 연악산이 말머리처럼 우뚝 솟은 봉우리를 드러낸다. 해발 706미터 연악산은 고향 사람인 내게 에누리도 없이 숨이 턱 밑까지 차도록 두어 개의 작은 봉우리를 지나고 나서야 정상을 허락했다. 정상은 황새가 날개를 펼친 모양새의 무을과 그 너머 여러 마을을 눈앞에 시원스레 펼쳐 놓았다.
뭉게구름이 관음보살이 든 연꽃처럼 하늘 높이 피어올랐고 한낮의 열기는 한껏 뜨겁게 달아올랐다. 수다사로의 하산 길은 가파르고 계곡을 따라 난 너덜 길은 비에 젖어 미끄럽다. 비탈길 중간에 큰 바위가 있는데 ‘사명대사 수행처 송암지’라는 푯말이 서 있다. 사명은 반듯하고 평탄한 곳을 두고 가파른 길과 계곡 너덜 길을 따라 위태한 이곳을 오르내리며 마음에 일었을 번뇌를 하나씩 지우며 불도에 정진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그는 이곳 수다사에서 의승(義僧) 1만여 명을 모아 법회를 열었다고 하니 호국(護國)의 목탁 소리가 온 계곡을 채우며 연악산 능선을 타고 하늘로 울려 퍼졌을 것이다. 산행의 들머리인 임도 반대쪽 수다사 날머리로 내려서면 무을 풍물(風物) 탄생지를 알리는 유래비가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쉬어가라고 손짓한다.
정월대보름 때면 뻣상모를 쓴 상쇠를 선두로 꽹과리, 징, 북, 장구를 든 건넛마을 풍물패가 온 동네를 집집이 돌며 지신밟기를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영남 풍물의 모태요, 전국 풍물의 씨앗이 이처럼 외지고 척박한 작은 농촌마을 내 고향에서 잉태되고 파종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또 삼백여 년 간 끊이지 않고 명맥을 이어와 전통 무형문화의 정수로 자리매김한 것은 정말이지 기적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다사 계곡물을 빈 페트병에 가득 담고 서둘러 시골 친구가 기다린다는 장터 정류소로 차를 몰았다. 친구와의 짧은 만남이 못내 아쉬워 놓았던 손을 두어 번 다시 맞잡았다. 고향을 벗어나며 뒤돌아본 연악산 능선 위로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황홀하다.
몇 해 전 시월 노란 은행잎으로 뒤덮인 수다사 마당에서 적(赤), 녹(綠), 황(黃), 삼색 띠를 드리운 풍물패가 한바탕 신명 나게 놀던 모습이 뭉게구름과 어우러진 노을 속에서 어른거린다. 고속국도 IC로 들어서기 전 죽장사에 들렀다.
끝을 알 수 없이 검푸른 하늘에 돛단배처럼 상현달이 떴다. 어둠이 내린 산사의 너른 마당에는 아련한 고향의 기억을 더듬던 내 모습처럼 오층 석탑이 달빛 아래서 고요히 천년의 꿈을 되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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