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시시포스

부산 동래 온천장 탐방기

인산(仁山) 2024. 8. 21. 13:31

가을이 다가오니 공기가 제법 서늘해졌다. 부산으로 내려온 지도 벌써 아홉 달이 지났다. 그사이 겨울, 봄,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동래 온천장에 있는 온천탕 중 규모가 제일 큰 허♡청엘 가보기로 했다. '동래' 하면 온천이 생각나고 '동래온천' 하면 허♡청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관광지나 다름없어 혼자라 좀 어색도 했지만 동네 대중탕에 가는 셈 치면 되니까.

부산에 내려온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고 숙소 부근 지하철역에서 세 정거장 거리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것이 오히려 무심하다 싶기도 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는데 이유 없는 발걸음이 있을 리도 만무하다.

 

'683년 재상이 입욕했다.' - 삼국유사 -

'왕이 행차했다.' - 동국여지승람 -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알려진 동래온천은 여러 역사 기록에 등장한다. 

 

19C 말 일본 자본이 몰려들어 온천수가 용출되는 곳에 여관을 짓기 시작하면서 온천관광촌이 형성되었단다. 1915년 부산 도심의 일본인 온천 여행객 수송을 위해 전차가 이곳까지 개통되면서 급성장했고 전차는 1968년까지 운행되었다고 한다.

과학적으로나 임상적으로 온천수의 효능은 두루 인증되고 있다. 신경통 류머티즘 외상 만성피부염 당뇨병 고혈압 동맥경화 불임증 각종 염증 등 온천수의 종류에 따라 많은 효능이 있다고 한다.

설화 하나가 은근히 동래온천을 자랑하며 그 효능을 알려주고 있다. 즉 신라 때 이곳에 살던 절름발이 노파가 다리를 절룩거리던 학 한 마리가 사흘 만에 완쾌되어 날아가는 것을 보고 학이 있던 자리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물에 다리를 담근 후 완쾌되었다는 '백학(白鶴) 설화'가 그것이다. 설화가 전하는 온천수 효과도 경이롭지만 하찮은 동물에게 조차 관심과 배움을 소홀히 하지 않은 노파의 지혜로움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퇴근 후 중앙역에서 러시아워의 혼잡한 전철을 타고 온천장역에서 내렸다. 온천장은 한때 부도심의 영화를 누렸던 만큼 건물들은 번듯하고 이면 골목을 따라 식당 숙박 유흥 등 시설이 촘촘히 늘어서 있다.

근처 돼지국밥 집에서 뜨끈한 국물과 부드럽게 잘 익힌 수육이 든 '말아국밥'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수육이 든 탕에 곁들여 정구지 무침, 깍두기, 양파와 고추, 새우젓과 된장 등 상차림은 다른 국밥집과 대동소이하지만 다 같은 부산 돼지국밥도 동네에 따라 또 식당에 따라 그 맛은 조금씩 다르고 차이가 있는 듯하다.

 

전체 면적 1300여 평 규모로 동시에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허♡청은 온천탕과 찜질방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1991년 개장 당시 동양 최대 규모였고 현재 N그룹이 소유 관리하고 있단다. 이곳 온천수는 국내 최대 마그네슘 함유 알칼리성 약식 염천으로 류머티즘 신경통 창상 요통 근육통 냉증 부인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너른 계단을 올라 선남탕과 선녀탕으로 남녀 입구가 좌우로 구분된 4층 카운터에서 락커 키를 받아 들고 입장이다. 신발장에 구두를 넣어 잠그고 들어선 락커룸, 이제껏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거대한 탈의실 수많은 옷장에 입이 쩍 벌어진다. 3층 찜질방은 락커룸에서 계단으로 연결되는데 남겨두어 다음에 가보기로 했다.

'대온천탕'으로 들어서면 거대한 입욕 탕과 그 위로 대형 유리천장 돔에 또 한 번 압도된다. 돔 기단 가장자리는 거북 구름 사슴 바위 구름 등 십장생이 양각된 장식을 둘렀다.

대형 욕탕을 중심으로 회목탕, 루비탕, 사파이어탕, 동굴탕, 노천탕, 반신욕탕 등 여러 온도의 효능별 욕탕과 다양한 종류의 사우나 방이 있다. 규모가 유난히 클 뿐 늙수그레한 아저씨,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아빠, 학생들 등 여느 동네 목욕탕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탕 저 탕 온탕 냉탕 사우나 방을 찬찬히 둘러보며 옮겨 다니니 온몸 뼈마디와 근육 곳곳에 누누이 쌓이고 뭉쳐 있던 긴장과 피로가 스르르 녹으며 풀리는 느낌이다.

고대 회목탕은 45°C로 히말라야에서 자라는 수령 4000년 직경 3미터가 넘는 회목(檜木)이 지각변동이나 지진으로 땅 속에 묻혀 300년이 된 목재로 만든 탕이라는데, 그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 의아하기만 하다.

그 옆 동굴처럼 생긴 곳에 철학탕 샴페인탕 영상탕이 모여있다. 무표정한 소크라테스 두상의 헤벌린 입에서 흘러나오는 미지 뜨끈한 온천수는 '철학탕'이라는 이름처럼 무슨 특색이 있는지 알듯 모를 듯 난해하다. 멋진 뿔을 머리에 인 사슴이 입으로 온천수를 뿜어내는 샴페인탕은 딱 맞는 온도로 톡 쏘는 샴페인처럼 뜨거운 탕에서 데워진 몸을 시원하게 식혀준다. 천정이 뚫린 노천탕엔 학업에 시달렸을 학생 서너 명이 담소하며 몸을 풀고 머리를 식히고 있다.

허심청 내부 모습(photo: hotelnongshim)

평소 그다지 즐겨 찾지 않는 목욕탕과 찜질방, 찜질방은 모르겠지만 목욕탕에서 한 시간을 넘긴 것은 평생 이번이 처음이지 싶다. 기실 온천장으로 발을 옮긴 것은 7월 한여름 산행 후 생긴 옆구리 피부 터러블, 주말 관악산 산행 때 바위틈에 긁혀 아물지 않은 왼손 검지 상처, 달이 지나도록 가시지 않는 오른손 엄지의 원인불명 저림과 더불어 움츠러들어 불편했던 심기도 깨끗이 씻어버리고 픈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탕에 들기 전 최저 80 최고 140을 넘는 수치를 보여주던 락커룸 한켠 혈압계가 각각 78과 129로 떨어진 수치를 가리킨다. 온천욕의 효과인지, 아니면 급하게 먹은 돼지국밥으로 올랐던 혈압이 소화가 되면서 제자리를 찾은 탓인지는 알 수 없다.

카운터에서 요금을 치루고 밖으로 나섰다. 조금은 쌀쌀하게 느껴져야 할 날씨인데 바깥으로 나온 지 한참인데도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은 시원스럽고 이마에서는 뺨으로 한 줄 땀까지 흐른다. 산삼이라도 한 뿌리 삶아 먹은 듯 온몸에 기운이 넘치는 느낌이다. 그냥 기분 탓일까?

가끔 호기심은 예측하지 못한 낭패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새로운 경험을 주고 삶의 지평을 넓혀주기도 한다. 건전한 호기심을 억누를 일만은 아닌 이유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그저께 상강이 지나고 보름이 갓 지난 터라 공기는 쾌적하고 하늘에는 달이 밝은 청아한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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