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쾌청하게 맑던 날씨가 오후 늦게부터 뿌옇게 흐려졌다. 날씨예보도 미세 먼지 '나쁨'이라고 알린다. 부산에 내려온 후로 이처럼 탁한 하늘은 처음이다. 늦겨울부터 봄철 내내 먼지 스모그 해무 등으로 혼탁했던 인천의 기억이 먼지 낀 창 너머를 내다보는 듯 흐릿하게 머릿속에 오버랩된다.
일과를 마친 후 운동화로 갈아 신고 사무실을 나섰다. 탁한 공기가 썩 내키지 않았지만 예정대로 비석마을과 감천 문화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중앙역에서 전철을 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부산전철 로고송을 뒤로하고 토성역에서 내렸다.
'갈매기 떼 나는 곳, 동백꽃도 피는 곳, 아~ 너와 나의 부산 영원하리'
토성역에서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방향으로 길을 잡고 경사진 오르막길을 한참 동안 걸었다. 머리 위로 떠오른 초승달은 가장자리 윤곽이 흐릿하다. 아미로와 천마산로가 만나는 곳 담벼락 그림 앞에서 지나던 노인 한 분이 혼잣말인 듯 말을 건넨다. 이 동네 주민이라는데 '길도 좁고 가파른데 가로등도 부실하다'며 구청을 질타하고, 급기야 지방자치 무용론을 열변한다.
올해 일흔일곱이라는 그 노인은 초면인 내게 고달팠던 인생역정의 단편들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대상 없는 불평과 푸념을 귀담아 들어주는 이가 반가웠는지 그의 넋두리는 그칠 줄 몰랐다.
천마산로를 따라 한참 걷다가 '한마음 행복센터'에서 음료 한 캔을 사서 그에게 들려주고 나서야 비석마을 쪽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초저녁이지만 겨울이 물러가지 않아 산동네에는 온전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미동 산 19번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다는데, 광복과 더불어 일인들이 물러나고 6.25가 터지자 피난민들이 산 16~19번지 일대로 몰려들어 움막을 짓기 시작했단다. 무덤 위에 세운 삶의 터전, 피란민들이 겪었을 고난과 강인한 생명력이 묘지 비석과 상석으로 쌓은 계단과 축대 여기저기에 고스란히 스며있다.
감천고개 쪽 언덕으로 난 소로들은 흐트러진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미로 같다. 양팔을 벌리면 양쪽 주택 벽과 벽에 손이 닿을 만큼 좁은 골목엔 이른 저녁인데 벌써 인적이 끊겼다. 고양이들만 낯선 이방인의 발걸음이 귀찮은 듯 느릿느릿 뒷걸음질 치며 길을 내어준다.
비석마을을 벗어나 감천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그 오른편 언덕에 아미성당이 자리한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또 사랑하라!' 담장 벽면 하트 모양 조명에 강변하듯 글씨가 선명하다. 그 옆 '행복하세요!'라는 글귀와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과 마더 테레사 수녀가 브로마이드 속에서 짓는 미소가 인자하다.
미움이라는 단짝과 시소를 타고 있어 자칫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파경이 다반사인 속된 사랑과는 달리 아가페, 그 사랑의 일관성 순결성 지속성은 아름답고 고귀해 보인다.
감천마을 입구로 들어서서 골목골목을 기웃대며 반시계 방향으로 크게 한 바퀴 돌았다. 기념품점 카페 등은 일찌감치 문을 닫았고 한산한 거리엔 나처럼 타지에서 탐방을 온 젊은 커플이나 친구들과 함께 놀러 온 학생들 무리가 가끔씩 눈에 띌 뿐이다.
감천(甘川), 아미산 천마산 옥녀봉에 둘러싸인 가파른 산비탈에 의지해 멀리 손바닥만큼 내민 바다를 바라보며 층층이 낮은 주택들이 빼곡히 어깨를 맞대고 들어선 마을이다.
하늘만 바라보며 풍년을 기약해줄 단비를 기다리는 계단식 천수답을 닮았다. 비록 외지고 척박한 산동네이지만 지친 몸 누이고 고달팠을 삶을 위로해준 포근한 보금자리였을 터이다.
감천마을을 뒤로하고 비탈진 길을 따라 내려왔다. 밤은 깊어 가는데 멀리 집집마다 불을 밝힌 그 마을은 더욱 또렷하다. 버스 종점에서 송도 입구 자갈치 남포 부산역을 차례로 지나는 17번 노선버스에 올랐다. 목마름 달래줄 달디 단 물처럼 이 밤 감천(甘川) 마을에 달콤한 꿈이 강물같이 넘쳐흐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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