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 따라 서울 한바퀴

쓰레기 섬과 달동네의 기억

인산(仁山) 2024. 8. 22. 11:05

서울 둘레길 제7구간, 난지도와 앵봉산

완연한 가을이다. 날씨는 맑고 공기는 선선하다. 지하철 분당선과 7호선을 갈아타며 가양으로 향했다. 서울 둘레길 걷기에 나서기로 한 날이다. 코스는 서울 둘레길 여덟 개 가운데 남겨둔 세 구간 중 하나인 제7코스, 가양역에서 출발하여 가양대교 노을공원 하늘공원 월드컵경기장 불광천 봉산 앵봉산을 거쳐 구파발역까지 걷는 16.6km 구간이다.

두세 명이 걷던 예전과 달리 고교 동기와 후배 등 함께 걸을 5명이 가양 전철역에서 만나 가양대교 쪽으로 발을 옮긴다. 가양대교의 한강 하류 쪽으로 난 보행로는 좁아서 겨우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다. 차량들이 질주하며 내는 소음을 애써 외면하고 간간이 지나는 라이딩 족들에게 길도 비켜주면서 긴 다리를 건넌다.

자전거나 차량보다 보행자를 최우선으로 배려하는 서구 여러 나라들이 새삼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시원한 맞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말없이 흐르는 민족의 젖줄 한강을 가로지르니 답답했던 가슴이 탁 트인다.


다리 끝 저 멀리 쓰레기 매립장에서 노을공원과 하늘공원으로 다시 태어난 옛 난지도가 거대한 언덕처럼 자리하고, 한강 상류 쪽에는 여의도의 고층 빌딩군이 태양을 등지고 무채색 실루엣으로 솟아 있다. 난지캠핑장 옆 난지 한강공원은 초목들로 무성하다.

한강 북단 둔치공원 한편에 마련된 국궁장에서는 과녁을 향해 호쾌하게 활시위를 당기고, 강변을 따라 곧게 뻗은 길을 따라 힘차게 페달을 밟고, 우리처럼 배낭을 메고 걷는 등 사람들은 각기 모두가 여유로운 모습이다.

노을공원과 하늘공원의 가장자리를 지나는 원래 코스 대신 그 중앙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노을공원으로 높이 놓인 난간이 달린 '558계단'을 오르며 간간이 뒤를 돌아본다. 한강 위 다리 멀리 관악산 등으로 시야가 넓어진다.

 
 

 

한때 전국 땅콩 생산량의 30%를 차지했고 아름다운 풍광으로 신혼여행지로도 각광을 받았다던 난지도, 1978년 시작된 쓰레기 매립으로 쓰레기 섬으로 전락했다가 1992년부터 시작된 생태환경복원 사업으로 난지공원으로 거듭났다.

서쪽 노을공원 안내도에는 반딧불이 서식지, 물놀이장, 파크골프장, 누에생태체험장, 도시농부 정원, 바람의 광장 등이 보이고, 여기저기 서있는 멋진 조각들이 눈길을 끌며 자꾸 걸음을 붙잡는다. 신비스러움을 자아내는 붉은 댑싸리 꽃으로 가득 찬 화단과 너른 잔디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노을공원을 가로질렀다.

 

노을공원에 비해 하늘공원은 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멀리 웅장한 북한산을 배경으로 꽃으로 수놓은 융단처럼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맹꽁이 전기차' 승차장 부근엔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다.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갈대밭에는 많은 사람들이 갈대에 파묻혀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다. 그야말로 갈대 천지요 사람 천지요 바람 천지다. 중국 일본 등 외국어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난초와 지초가 어우러져 아름답던 난지도가 쓰레기 섬으로 전락했다가 다시 시민들에게 각광받는 휴식처로 거듭난 것이 드라마틱한 한 편의 인생역정을 보는 듯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지그재그로 놓인 나무계단을 따라 줄지어 오르는 사람들과 스치며 월드컵경기장 쪽으로 내려갔다.

상암을 대한민국 축구의 메카로 만든 월드컵경기장은 경기가 없어 조용하지만 대형마트 등이 들어서 있는 바깥 주변은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 오간다. 경기장 동편에 접한 불광천 천변로로 내려서니 번잡함은 사라지고 둘레길다운 길로 돌아온 느낌이 든다.

멀리 북한산이 바라다보이는 천변길을 한참 걷다가 좌측으로 방향을 꺾어 '증산로 5길'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오르막 길을 지나 증산 배수지의 정자에서 자리를 깔고 배낭을 열었다. J가 슈퍼에 들러 사온 막걸리를 반주 삼아 김밥 과일 등으로 허기를 달랬다.

서울 둘레길 제7구간은 은평 둘레길 일부와 겹친다. 수색산 아래를 관통하여 수색동과 신사동을 연결하는 은평터널 위를 지나간다. 대학 졸업과 함께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 수색동 단칸방에서 지내던 시절이 떠오른다.

 

가루 연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수색역 부근과 미로처럼 얽혀있던 골목길 풍경은 개발의 바람에 날려 사라졌을 것이다. 달동네, 단칸방, 최루탄, 주경야독, 독주, 블랙아웃,... 청년시절 서울의 기억은 대개가 가난하고 버겁고 마음이 아린 것들이다.

 

흐트러 실타래처럼 좁고 비탈진 골목길로 오가던 노량진 달동네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지척에 있는 한강대교와 63 빌딩 등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아득히 먼 딴 세상처럼 느껴졌었다. 재개발이란 미명 하에 내몰린 달동네 원주민들은 어디로 뿔뿔이 흩어졌을까. 높고 번듯한 빌딩과 잘 사는 부자들만 모여드는 서울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 속 '특별'하고도 유별난 도시다.

 

배수지에서 시작되는 봉산 구간부터 앵봉산을 지나 구파발역까지는 얕은 산을 오르내리는 길이다. 걸음은 무거워지고 숨은 가쁘지만 동행들은 둘씩 셋씩 짝을 바꿔가며 군대, 아들 딸, 출강, K부부 연애시절, 부동산, 사내 문화 등등 주제와 소재를 바꿔가며 주고받는 얘기는 끝이 없이 이어졌다.

 

낮은 봉우리 두어 개를 지나 봉산 봉수대에 올라섰다. 파란 하늘에 뜬 흰 구름이 봉수대에서 피워 올린 연기처럼 보인다. 건너편에는 흰 암봉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북한산이 강인한 위용을 뽐내며 앉아있다. 상승기류에 몸을 맡긴 까마귀들은 큰 날개를 펴고 활공하며 유유자적 인간들의 세상을 내려다보며 자신들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둘레길 옆에 간간이 서 있는 시비가 쉬어가라 말을 건넨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 - 윤동주, <새로운 길> 일부 -

 

봉산 자락을 벗어나고 서오릉 연결로를 지나고 앵봉산으로 접어든다. 봉산과 앵봉산 사이에 위치한 생태놀이터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아담한 화장실은 드러누워도 될성싶게 말쑥해서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나중에 산행 과정 다 기억나나요?"
"틈틈이 메모를 해야지!"
후배 L이 예닐곱 시간에 이르는 산행의 후기를 어떻게 기억해서 쓰는지 궁금했나 보다.

사실 순간순간의 느낌 감정 생각들은 휘발성이 있어 금방 기억의 저장고 밖으로 다 날아가 버린다. 그래서 틈틈이 스마트 폰에 메모를 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나마 수첩을 꺼내고 펜을 드는 번거로움은 없으니 문명의 이기를 톡톡히 보는 셈이다.

그렇지만 순간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은 익지 않은 날것이라 직관과 주관이 많고 곳곳에 고집도 배어 있을 수밖에 없다. 김치로 치면 갓 버무려낸 갓김치라고나 할까. 묵은 김치 같은 숙성된 맛이 나는 글을 접할 때면 부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까닭이다.

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해발 230미터 앵봉산은 봉우리 몇 개를 오르내린 후 연봉의 맨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낸다. 전망대에서 고개를 내밀고 좌측을 돌아보면 지나온 봉산이 길게 뻗어 있다. 바로 아래 앵봉산 서편에는 숙종의 능인 명릉을 비롯 경릉, 창릉, 익릉, 홍릉 등 서오릉이 안겨있다.

진관동 구파발역 쪽으로 내려서며 둘레길 걷기를 마무리한다. '서울 둘레길' 앱 스탬프북에 제7구간 스탬프 세 개를 획득한 후배가 신기하고 뿌듯해한다. 동행들도 모두 흐뭇한 표정이다. 전철역 부근은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부쩍 짧아진 해는 산 그리메를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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