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 따라 서울 한바퀴

중심과 주변의 만남

인산(仁山) 2024. 8. 22. 10:44

서울 둘레길 제4구간, 수서에서 사당까지

처서가 지나고 백로를 앞둔 여름의 막바지다. 아침에 나서니 바깥바람이 서늘하다. 아파트 사이로 난 작은 숲엔 매미 소리가 멈췄고 그 빈자리를  귀뚜라미 소리가 대신해서 채웠다.

야탑역에서 일단의 병사들이 버스터미널과 전철역 등으로 각기 제 길을 찾아 바삐 흩어진다. 지난 18일 철원 K9 자주포 사고로 산화한 두 병사도 저들처럼 앳되고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일 것이다.

친구들과 둘레길 걷기로 하고 약속 장소인 수서역으로 가는 길이다. 요즘 전철 노약자석에 빈자리가 없는 것을 보며 고령시대를 실감한다. 등산복에 스틱을 든 노약자석 두 분도 70쯤은 돼 보인다. 몸을 잘 건사하면 나도 저분들 나이에도 야산이나마 다닐 수 있을까. 반 세기 넘게 몸을 부렸으니 치과에서 '총체적 난국 대형공사 요'란 진단에 서운해할 일도 아닌 듯싶다.

친구는 18년 전에 산 '누비*' 차량이 멀쩡해 버릴 수 없어 아직도 몰고 다닌단다. 가족과의 추억도 배어 있어 선뜻 바꿀 마음이 없나 보다. 물건은 오래되면 귀해지고 귀해지면 골동품 취급을 받지만 물건과 달리 나이 든 사람을 빗대는 '골동품'은 더 이상 귀하다는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서울 둘레길 8개 구간 가운데 4개는 한강 이남에 있다. 그중 하나가 수서 쪽 대모산을 출발하는 제4구간이다. 그 길은 대모 구룡 두 산을 지나 매헌 기념관이 있는 양재 시민공원, 그리고 우면산을 휘돌아 사당까지 이어진다.

수서역 6번 출구 쪽에서 두 친구를 만났다. 들머리에서 할머니가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의 둘레길 스탬프를 빈 종이에 눌러 찍고 대모산 자락으로 올라섰다. 늙은 할미를 닮아 대고산(大姑山), 할미산이라 불리던 것을 태종의 헌릉을 모신 후 어명으로 대모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단다. 

차량으로 가득 찬 도로를 벗어나자 금방 도심은 멀리 사라져 버린 듯하고 산은 나무 풀 숲 벌레소리 등 싱그런 생명들로 그득하다. 해발 293미터 대모산 정상 바로 아래에 비껴 앉은 전망데크에 서니 서울 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 병풍처럼 빙 둘러선 아차 용마 불암 수락 북한 백악 인왕과 남쪽의 관악과 서쪽으로 멀리 계양도 눈에 들어온다.

 

둘레길은 능선길과 샛길로 서로 만났다가 어긋나기를 반복하며 대모산에서 어깨를 나란히 이웃한 해발 306미터 구룡산으로 이어진다. 내곡동으로 내려서며 구룡산을 빠져나와 헌릉로 위로 놓인 육교를 건너고 맑은 물이 햇살에 반짝이는 여의천을 따라 양재 시민의 숲으로 느린 걸음을 옮긴다. 산뜻하게 복개된 여의천은 고속도로를 따라 나란히 양재대로 밑을 통과하여 양재천에 안겨든다.

양재 시민의 숲은 삼풍참사 희생자 위령탑, 848 대한항공 피폭자 위령탑, 6.25 때 혁혁한 전공을 세운 유격 백마부대 충혼탑 등을 넉넉한 숲에 품고 영령들을 위로하고 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으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 윤봉길 의사 -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일왕의 생일 축하 기념식장에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 등을 처단한 민족의 영웅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매헌기념관도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다. 두 아들에게 준 유서에 그의 애국심이 또렷이 서려있다.

 

숲에서는 야외 결혼식이 있었나 보다. 아빠와 아이들 사람들 모습은 정답고 한가롭다. 늘 오가던 혼잡한 고속도로 그 옆 공원 숲이 비밀의 정원처럼 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둘레길 제4구간 구룡산과 우면산을 잇는 양재 시민의 숲 구간은 산 자와 죽은 자 과거와 현재가 함께하고, 주민과 산객이 어우러지고 도시와 변두리가 서로 악수하며 공존한다. 그것은 어색한 공존이 아니라 서로 익숙하고 친숙한 듯 자연스러운 만남이다. 경계를 넘으면 새 지평이 열리고 더 넓은 세계가 있다.

소가 누운 모양이라는 우면산 초입은 유난히 칡넝쿨이 우거져 능선을 덮었고 키 큰 나무를 타고 올랐다. 사람들은 선을 긋고 편을 가르고 서로 상처를 주기에 여념이 없어 보이는데 자연은 저 칡넝쿨처럼 서로 어우러져 무성하다.

 

2011년 7월 산사태로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던 교훈 때문인지 산정에서 직선으로 뻗어 내린 10여 개의 크고 작은 계곡들은 사방공사로 말끔히 정비되었고, 이번 장마로 내린 빗물을 머금고 있던 숲은 계곡 위로 놓인 잔교 아래로 물줄기를 흘려보내고 있다. 우면산 자락을 휘도는 길게 늘어진 산길은 평탄하고 호젓하다. 남태령 아래 사당 쪽 날머리로 둘레길을 빠져나왔다. 

 

"저만치 처서가 지나는 길목엔

 막바지 더위가 치기를 부리고  

 산등성이 위에는 계절이 미끄럼질 치고 있다"

- 인산, <수리산을 오르며>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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