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둘레길 제5구간, 석수에서 사당까지
장장 열흘간의 추석 연휴다. 그 사흘째 되는 날 느긋한 아침식사 후 근질거리는 몸을 달랠 길이 없다. 어디 바람 쏘일 곳 없을까? 가깝지만 익숙해서 별다른 감흥이 없는 동네 뒷산 대신 가보진 않았지만 전철이나 광역버스로 금방 닿을 수 있는 그런 곳.
산행도 여행과 마찬가지로 한 번 갔던 곳 보다 새로운 곳에 더 끌리게 마련이다. 둘레길은 추석 종합 선물세트처럼 각기 다른 특색을 가진 코스들 중 하나를 골라서 둘러보는 재미를 준다.
지난달 수서역에서 사당역까지 서울 둘레길 제4코스에 이어 엊그제 망우리에서 광나루까지 제2코스를 다녀왔던 터였다. 매력에 빠져든다는 게 이런 것일까? 무엇이든 자기만의 매력을 가진 것은 아름답다.
목동에서 출발한 친구와 석수역에서 합류하여 전철역에서 지척인 서울 둘레길 제5코스 입구로 들어섰다. 정오가 가까운 시각에도 배낭을 멘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십중팔구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하나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을 종심(從心)에 가까운 나이의 어르신들이다.
키 큰 소나무가 시원스레 숲을 이룬 '늘솔길' 아래 솔 숲 드문드문 놓인 평상에 앉은 사람들 모습이 여유롭다. 호압사 뒤 능선 언덕 쉼터 벤치에는 산객들이 포대화상처럼 관조하듯 달관한 듯 햇살 좋은 초가을 솔바람에 몸을 맡긴 채 미동도 않고 앉아 있다.
둘레길은 능선을 넘어 서울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능선 바로 아래 사찰 텃밭에 줄지어 자란 배추가 탐스럽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물건이든 가지런한 모습은 보기에 좋다. 본성은 감추려야 감출 수가 없는 것이어서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지런한 모습은 반듯한 본성을 보는 듯하다.
호암산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능선 아래 삼성산 성지가 있다. 1839년 기해박해로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한 앵베르·모방·샤스탕 세 프랑스 신부의 무덤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나옹·무학·지공 세 스님이 수도한 곳이라 붙여졌다는 삼성산(三聖山), 그 산 한 자락이 벽안의 순교 성인 세 분을 기념하는 성소가 되었으니 아이러니하다.
삼성산 자락을 휘돌던 둘레길은 골과 능선을 따라 수많은 갈림길과 합류하거나 갈라지며 제 갈길로 나아가다가 관악산 야외식물원으로 난 포장도로로 내려선다. 그 도로를 따라 '관악산공원' 대문을 지나면 '서울 국립대학'의 세 단어 첫 글자 자음 ‘ㅅㄱㄷ’을 조합해서 만든 조형물이라는 서울대 정문이 나온다. 상징물이나 이름 상호 등에 우리말 한글 대신에 영어나 외래어가 넘쳐나는 요즘 우리나라 최고 명문 국립대학 교문 조형물이 한글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니 그나마 마음의 작은 위안이 된다.
관악산이 품은 봉천동, 인헌동, 남현동을 가로질러 북쪽 산자락 끝에 안겨 있는 관음사 뒷길로 내려섰다. 담장 너머로 상반신을 살짝 드러낸 순백의 관음보살이 햇살에 눈부시다. 신라 말엽 895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대웅전 명부전 삼성각과 함께 용왕각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앱 지도를 보니 서울 둘레길 제5구간은 그 밑 땅 속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 터널 구간과 궤적을 같이 한다. 또 관악산 둘레길 1, 2, 3 구간과 서로 겹치거나 교차하면서 관악산 북쪽 능선 줄기들을 오르내리며 길게 휘돈다.
사당역 버스정류장엔 노선별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섰고 지하철역 입구는 드나드는 인파로 북적인다. 번개에 콩 구워 먹듯 급하게 나선 서울 둘레길에서 관악산 둘레길과 조우하고 성인들과 영웅을 만나고 동량을 길러내는 요람도 구경했으니 호사롭게 한나절을 보낸 셈이다. 발은 저리고 몸은 쑤셔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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