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 따라 서울 한바퀴

혼백과 함께 거니는 길

인산(仁山) 2024. 8. 22. 10:27


서울 둘레길 제2구간, 망우 공원에서 광나루까지

서울 둘레길 두 번째 구간을 향해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전철역 화장실 옆칸에서 들려오는 토악질 소리가 힘겨워 보인다. 또래 혈기왕성한 어떤 친구들과 어떤 주제를 놓고 밤새워 잔을 기울였을까? 내 젊은 시절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 누군가와 술을 마시고 다시 토해낸 술은 몇 됫박이나 될까.


분당선 강남구청에서 7호선으로 갈아탔다. 한강을 건너고 건대, 용마산, 상봉을 지나 태릉에서 다시 6호선 전철로 환승하여 한 정거장 떨어진 화랑대에서 내렸다. 항상 시간을 잘 지키는 친구 M과 약속시간에 맞게 합류했다.

 

서울 둘레길 제2구간은 화랑대역에서 용마산과 아차산 자락을 지나 한강변 광나루역까지 이어지는 12.6km 약 대여섯 시간 걷는 평이한 코스다. 당초 화랑대역 부근에 있는 문정왕후의 태릉과 봉화산을 덤으로 둘러보기로 했던 마음을 바꾸어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망우역에서 묵동천을 따라 걷는 길은 갈대, 잡초,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어우러져 있다. 묵동천엔 오리가 한가롭고 왜가리는 날개를 퍼덕여 자리를 옮겨가며 먹이를 찾는다. 봉화산역과 경춘선 신내역을 지나고 옛 주택들이 철거되고 곧 개발의 바람이 불어닥칠 구룡산 자락도 지났다.

 

구룡산과 망우공원 사이에 아늑하게 안겨 있는 중캠핑장은 예약이 모두 차서 빈자리가 없단다. 그곳 매점 야외 테이블에서 커피를 한 잔씩 들며 다리를 쉬게 했다.

 

망우리 공원 초입 야구장과 게이트볼 게임장을 지났다.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 300명이 일본군과 혈전을 벌인 곳에 13도 창의군 탑이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로 높이 솟아 있다. 1907년 일제의 조선군대 해산을 기화 전국에서 모인 의병 1만여 명이 서울로 진격해서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기개는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듯하다.

 

베토벤 슈베르트 슈트라우스 등이 영면하는 비엔나 중앙 묘지, 스메타나 드보르작 등이 묻힌 체코 비셰흐라드 묘지 등 외국에서도 망자들의 휴식처는 시민들에게 휴식과 위안을 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 망우공원도 '공원묘지'가 아니라 '묘지공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싶다.

망우역에서 출발해서 묵동천을 따라 걷는 길
진주 강공, 풍천 임공, 덕수 이공, 정선 전공, 평창 이공, 의령 옥공, ... 고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영면하는 곳공원 능선을 따라 난 오르막 비탈길 주변엔 봉분과 비석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반듯하거나 허물어져 내린, 잔디가 가지런하거나 잡초로 뒤덮인, 번듯한 비석이 있거나 주인을 알 수 없는,... 제각기 다른 세월 다른 인생을 살았듯 봉분도 모습이 제각각이다.

 

이 공원에는 한용운 박인환 이중섭 지석영 조봉암 안창호 오세창 방정환 계용묵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살다 간 50여 명의 유명인사도 잠들어 있다. '사잇길'을 따라 가면 그들을 만나 뵐 수 있다.로 떠났다."

공원 초입 산허리로 난 둘레길 아래쪽에 시인 박인환(1926~56)이 산 아래 봉긋하게 솟은 봉화산과 그 너머로 한눈에 온전히 들어오는 북한산과 도봉산을 조망하며 영면하고 있다. 그는 서른의 짧은 생을 뒤로하고 목마를 타고 하늘로 돌아갔다.

 

이름 모를 묘지 주위에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작년 시월 들렀던 만일사 경내에 만발했던 구절초 모습과도 닮았다.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라던 박용래 시인의 시가 저절로 떠올랐었다.

 

천재화가 이중섭(1916~56)은 망우 약수터 옆 큰 노송 한 그루가 친구처럼 옆에 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말끔히 단장된 안식처에 잠들어 있다. 망우 약수터에서 약수를 한 모금 마셨다.

둘레길 공터에 열린 작은 음악회
시인 박인환의 묘
수 천 수 만 개의 작은 돌로 쌓아 올린 '국민 강녕 탑'은 삼각형의 뾰족한 탑이다. 둘레길 위쪽 산비탈에 위태하게 자리하지만 탑을 쌓았다는 83세 할아버지의 지극한 정성과 의지가 담겨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을 듯 견고해 보인다.

 

둘레길 초입에 만났던 부부로 보이는 노인 두 분과 망우공원에서 다시 조우해서 잠시 얘기를 나눴다. 각각 81세 69세로 띠 동갑 오빠와 여동생 사이로 우리처럼 광나루역까지 갈 요량이란다.

이분들을 보니 '100세 시대'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현실이고 내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라는 맥아더의 말과 함께 영화 인천 상륙작전에서 맥아더로 열연한 리암 니슨의 대사를 음미해 본다.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하지만 이상을 포기하는 건 영혼을 주름지게 하지."

산신제단 부근에서 둘레길을 잠시 벗어나 능선으로 길을 잡아 용마산 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망우산과 용마산이 마주치는 능선 위 쉼터에는 벤치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이 '통기타 70' 그룹의 노래를 듣고 있다.

 

아차산과 용마산은 '긴고랑길'을 사이에 두고 형제처럼 어깨를 마주하며 동과 서로 나란히 솟아 있다. 용마산과 고구려정, 아차산 능선을 따라 늘어선 고구려 보루들을 지나고 새해 일출 조망 명소인 해맞이 광장도 지났다.

서울 랜드마크의 하나로 새로이 자리한 잠실 롯데빌딩은 숨바꼭질하듯 능선에 가렸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동쪽으로 한강 위를 차례로 가로질러 놓인 암사 강동 미사 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초기 백제 때 축성되었다는 아차산성 터를 둘러보고 낙타고개에서 광나루터로 내려서는 둘레길 제2코스 날머리로 방향을 잡았다.

조선 태조가 능묘 자리를 정하고 근심을 잊었다고 해서 붙였다는 망우(忘憂) 고개에서 유래했다는 지명. 근심이 없을 듯한 망우 공원 망자(亡者)들처럼 오늘 하루만큼은 나도 모든 근심과 시름을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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