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도 운서동에서 지척인 삼목항으로 향했다. 신도를 거쳐 장봉도를 오가는 첫 배가 7시에 출발한다. 차량과 사람들이 삼목항 선착장 주변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다. 배표는 매표소에 신분증과 함께 탑승자 명부와 코로나 19 신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구입할 수 있다.
옹진군 보건소 소속 직원 서너 명이 선착장 입구에 열화상 카메라를 세워 놓고 발열 검사기로 탑승객들의 체온 검사를 한다. 다행스럽게 옹진군 내에서는 코로나 19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았고, 사전투표나 투표를 마치고 섬을 찾는 외지인들에 의한 코로나 19 전파를 예방하려 특근 중이라고 한다.
선착장 가장자리나 해변에서 갈매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루를 시작할 채비를 하고 있다. 세종 1호가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선착장으로 들어오자 스무여 명 승객에 이어서 차량 20여 대가 꼬리를 물고 배로 올랐다.
양 뱃전 쪽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면 정사각형 모양의 객실이 나오는데 승객이 적어 270명 정원 객실이 더 넓어 보인다. 객실 벤치에 배낭을 내리자 잠시 후 엔진 소리가 커지며 배가 움직인다. 10여 분 만에 신도항에 도착해서 일단의 탑승객과 차량을 내려주고 다시 30여 분 후에 장봉도 옹암 선착장에 닿았다.
섬으로만 구성된 옹진군에는 113개의 섬이 있고 그중 유인도는 23개라고 한다. 영종도 북서쪽에 위치한 장봉도(長峯島)는 대청, 덕적, 백령, 북도, 연평, 영흥, 자월 등 옹진군 7개 면 가운데 신도, 시도, 모도와 함께 북도면에 속한다. 그 이름처럼 모양새가 길고 봉우리가 많다. 지도를 보면 앞 발로 버티고 서서 긴 주둥이를 서쪽으로 쳐든 악어 같기도 하고, 육지 쪽으로 달려가는 렙토 사우르스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배에서 내려 선착장 앞에서 기다리는 마을버스에 올랐다. 채 열 명도 되지 않는 승객은 모두 산행객이거나 상춘객으로 보인다. 버스는 옹암해변, 거머지산, 말문고개, 국사봉 아래 고개, 한들 해수욕장, 북도면 장봉출장소 등을 거쳐 간다. 도로변과 산은 벚꽃 개나리가 신록과 어우러져 아직 봄이 한창임을 알린다.
버스는 15여분 만에 장봉 4리 건어장 해변 가장자리 종점에 닿았다. 건어장은 이름처럼 옛날부터 물고기를 널어 말리던 곳이라고 한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각기 제 갈 길로 갔고,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안내도를 살펴본다. 버스를 세우고 담배를 꺼내 든 기사 양반에게 개략적인 코스를 물어보니 윤옥골 해변을 거쳐 가막머리로 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갑갑한 마스크를 벗고 윤옥골로 향하는 해변 산자락 계단을 오르며 산행을 시작한다. 계단 위에서 뒤돌아 보면 건어장 해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어선 엔진 소리를 들으며 해안에 접한 산길을 따라 한동안 걷다가 갈림길에서 능선 쪽을 버리고 코발트 빛 바다가 보이는 해변 쪽으로 내려간다. 어깨 넓이 계단길 옆에 현호색과 산딸기가 각기 군락을 이루고 있다. 야생의 들꽃도 끼리끼리 모이고 서로 의지하는 것이 사람과 다름없어 보인다.
파도 소리를 베이스 삼아 까마귀가 깍깍 소리치고 어선 한 척이 통통거리며 바다의 정적을 깬다. 윤옥골까지 이어진 해변은 가히 바윗돌 박물관이다. 시간의 나이테를 온전히 끌어안은 각양각색 바위들이 해변과 산기슭을 뒤덮고 있다. 혼동스러운 듯 무질서한 듯 뭐라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거대한 지질공원 바위 숲을 거닌 느낌이다.
암석 길 해변이 끝날 즈음 바위틈에 노란 꽃을 피운 산괴불주머니가 인사한다. '보물 주머니'라는 꽃말처럼 자루같이 생긴 꽃 속에 귀중한 보물을 담고 있을 듯하다. 산뽕나무에서 짹짹이는 박새는 가지에 숨어 눈에 띄지 않는다. 빨간 사과로 이브를 유혹하던 뱀처럼 뱀딸기 꽃은 노란 꽃잎 다섯 개로 산객의 눈을 유혹한다.
절벽을 낀 해변과 달리 해수욕장처럼 자갈과 모래사장이 깔린 윤옥골 해변으로 빠져나왔다. 윤옥골은 물이 흐르는 곳에 길이 나 있어 '유노골'이라 부르기도 하고 사슴이 살았다고 해서 '유녹골'이라고도 한다고 안내판이 설명한다.
배낭을 멘 부부 한 쌍이 능선길에서 내려와서 앞서 걸음을 재촉한다. 자갈 반 조개껍질 반인 해변이 끝나고 다시 바윗돌과 암벽이 늘어선 해변을 지난다. 수 천만 수 억의 바윗돌은 각기 저만의 크기 모양 색깔을 가졌다. 발밑 자갈이 서걱거리는 소리에 갈매기가 끼룩거리며 추임새를 넣는다.
골짜기가 양쪽으로 갈라진 곳으로 소쩍새가 잘 울었다는 쪽쪽골에서 유노골 해변을 벗어나 1.9km 거리의 가막머리로 향한다. 좌측으로 해변을 낀 산기슭을 따라 난 길은 간간이 겉면에 굴곡진 물결 모양을 드러낸 바위들을 불쑥불쑥 내놓는다.
앞뒤 해안선이 눈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한 첫 전망대에 서면 가까이 있는 사염, 아염, 동만도, 서만도가 눈에 들어오고 멀리 있는 섬들은 모습이 흐릿하다. 앞서 갔던 부부는 등로에 배낭을 나란히 내려놓고 해안 쪽 가파른 비탈에서 허리를 굽히고 산나물을 캐기에 여념이 없다.
해안을 따라 난 산기슭을 오르내리며 굽이도는 길은 부산의 이기대 산책로를 축소해서 가져다 놓은 듯하다. 두 번째 조망대 앞으로 동만도와 서만도가 성큼 다가와 있다. 순한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씻어 준다. 가막머리를 휘돌아가는 어선의 엔진 소리는 숨 가쁘다.
장봉도 북서쪽 끝단 가막머리, 큰 봉우리의 끝머리라는 뜻, 또는 옛날에 감옥이 있던 자리라 해서 붙은 이름, 그 너른 전망대에 올라섰다. 산객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갈매기 울음소리만 텅 빈 공간을 채운다.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는 낙조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한동안 주위를 조망했다. 뒤이어 도착한 나물 캐던 부부에게 전망대를 내어주고 장봉항 쪽을 향해 능선 길로 든다.
장봉도의 속살에 눈과 마음을 빼앗기며 쉬엄쉬엄 걷다 보니 출발 후 세 시간이 다 되어가지만 4km 남짓 거리를 걸었다. 장봉 4리를 출발해서 윤옥 골 해변과 가막머리를 지나 장봉항으로 회귀하는 코스를 두고 '네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버스 기사님의 말은 일찍이 마음에 없다.
장봉도는 섬 이름의 유래처럼 능선이 길쭉한 지형을 따라 뚝 끊어질 듯 주저앉았다가 다시 솟아 올라 수많은 봉우리들을 내놓으며 가막머리에서 장봉항까지 길게 이어진다. 줄지어선 일단의 산객들과 부부 산객들이 간간이 가막머리 쪽으로 스쳐 지난다. 능선에는 참나무들이 온통 연초록의 잎사귀를 틔우고 봄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주저앉았다 솟아오른 여러 봉우리 위에 2층이나 단층의 팔각정이 자리하고 있다.
장봉도에서 국사봉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는 해발 130미터 봉수산 정상에는 봉화대와 팔각정이 자리한다. 이 봉화대는 대동여지도를 참조해서 남한지역 봉수망을 재구성한 봉수망도(熢燧網圖)에 봉화의 서해 쪽 기점이라 표기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팔각정에 올라서니 북쪽의 주문도, 석모도, 강화도 등이 가까이 보인다.
진촌해변을 좌측으로 끼고 가다가 만나는 장봉 3리와 4리의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애매하여 진행할 방향을 두고 잠시 시간을 지체했다. 장봉 3,4리를 잇는 포장도로를 건너고 임도처럼 넓고 평탄한 길로 접어드나 싶더니 이내 비스듬한 산길이 나타난다.
임도에 접한 산기슭에서 아낙들이 쑥을 캐고 바이커들은 산길이 힘들었는지 안장에서 내려 핸들을 잡고 걷는다. 장봉 3리와 진촌 해변을 잇는 고갯마루에 앉아 있는 두 번째 팔각정을 지난다. 건말마을로 내려가는 계단길에 남산제비꽃이 옹기종기 모여 피었다. '순진무구한 사랑'이란 꽃말처럼 청초한 모습이다. 산행 출발지였던 건어말 정류소와 건어말 해변도 멀리 보인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서 발을 재촉한다. 봄 나들이객들의 낯선 발소리 때문인지 능선 아래 해변 마을 쪽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능선을 덮은 신록이 절경이다. 당나라 시인 두목은 <산행(山行)>이란 시에서 "서리 맞은 낙엽이 이월 봄꽃보다 더 붉어라(霜葉紅於二月花)"라 했는데, 사월 신록의 자태 또한 봄꽃에 뒤지지 않아 보인다.
장봉 2리와 국사봉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지나서 국사봉 정상까지 짧은 구간은 가팔라 산행코스 다운 면모를 보인다. 깔린 낙엽, 잎이 무성한 참나무, 바다가 각기 갈색, 연녹색, 회청색 톤 빛깔의 단층을 이루고 있다.
해발 150미터 국사봉 위에도 팔각정이 자리한다. 노 산객 한 분이 정자 위에서 막걸리와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며 바람을 벗 삼아 세월을 낚고 있다. 국사봉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최고봉의 위엄이라도 보이려는 듯 반대편 내려가는 길도 가파르다.
고가 보도가 놓인 말문고개 좌우 도로변에 만개한 벚꽃에 상춘객들이 넋을 빼앗기고 있다. 이어진 능선길 중간 구름다리를 넘고 주인 없는 팔각정에서는 한 번 누워도 본다. 비행기 길인지 정작 영종도에서 들리지 않는 비행소음이 이따금씩 귀를 따갑게 한다. 장봉 혜림 요양원과 지적장애인 거주시설인 장봉혜림원 경내를 지난다. 여러 건물들과 조경이 아름다운 이곳에서 이용자 100명과 직원 64명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혜림원을 지나면서 산행도 막바지로 치닫는다. 산행 중 마지막 봉우리이자 장봉항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상산봉을 힘겹게 올랐다. 상산봉은 산행 코스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조망의 포인트로 긴 산행의 노고를 위로라도 하는 듯 주위의 크고 작은 섬뿐 아니라 장봉도 전체를 눈앞에 펼쳐 놓는다.
장봉항 옆 상산봉 기슭으로 내려섰다. 태양은 중천에 있고 날씨는 더없이 쾌적하다. 어선 네댓 척이 물 빠진 갯벌에 비스듬히 누워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선착장 옆 바닷가에 인어상이 자리한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위 위에 머리칼을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비스듬히 앉아 있는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장봉 바다역 매표소에서 오후 3시 출발 배표를 사서 세종 7호에 올랐다. 입도할 때와는 달리 차량과 승객이 제법 많다. 배가 출발하자 장봉도는 멀어지고 갈매기들은 배 주변에서 눈부시게 비행한다. 저미다 호기롭게 나는 모습이 젊은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을 닮았다. 20-04
'아름다운 우리 산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백산과 부석사 (0) | 2024.08.31 |
---|---|
영남 알프스를 찾아서(I) (0) | 2024.08.31 |
운길산, 수종사의 종소리 (5) | 2024.08.30 |
경주 남산, 불국토의 꿈 (0) | 2024.08.30 |
삼성산, 성인들의 산 (2) | 2024.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