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에서 복원한 영남길 경기구간은 총 116km 10개 구간이다. 그 가운데 미답 구간인 제1구간과 제5구간 중 제5구간을 걷기로 했다. 분당선 기흥 역에서 내려 에버랜드까지 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무인운전 경전철 에버라인으로 환승했다.
높은 교각 위로 놓인 철로를 달리는 전철, 창 밖으로 절정으로 치닫는 봄이 스쳐지나고 창 안으로는 햇살이 눈부시게 들이친다. 짧은 청반바지 차림의 젊은 아가씨를 비롯해서 30여 미터 길이 객실이 젊음으로 가득하다.
서울 쪽으로 향하는 '수여선 옛길'은 양지면 남곡리를 출발해서 봉두산, 용인중앙시장, 금학천을 거쳐 용인시청까지 11.6km 거리다. '수여선 옛길'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일제 강점기에 여주 지역의 미곡을 송출할 목적으로 1930년 말 개통된 수원-여주 간 73.4km의 협궤열차 수여선이 지나던 구간과 겹치기 때문일 것이다.
수여선은 경기만 염전 지대의 소금을 일본으로 송출하려 1937년 개통된 인천 송도-수원 간 52km 수인선(水仁線)과 더불어 수탈 목적으로 부설된 것이다. 오래전 협궤 철로 위를 기우뚱거리며 달리는 수인선 열차를 타고 소래포구로 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가물거린다. 수여선은 1972년 폐선되었고,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협궤열차 수인선도 1995년 운행이 중지되고 오이도에서 인천역까지 복선전철로 대체되었다.
운동장•송담대 역에서 내려 10번 버스로 환승해서 남곡리로 이동했다. 제5, 6구간의 분기점 남곡리에서 용인장례식장까지는 새로 닦인 자전거 도로가 산뜻하지만 이정표가 없어 시간을 지체할 수도 있다. 송문리 노적산 인근에서는 세종-포천 간 고속국도의 안성-용인 구간 공사가 한창이다.
'문화유적 류복립 묘' 표지판 옆 산기슭에 '효자 학생송지렴지문 孝子學生宋之濂之門' 정려각이 자리한다.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 서생에게 임금이 직접 정려 현판을 내렸다니 그의 효행이 얼마나 깊고 넓었을지 가늠할 수 없다.
류복립 묘역은 입구를 막았고 그 옆을 지날 때 제실 앞에서 견공 두 마리가 길손을 경계하며 짖어댄다. 야산 고갯길 산자락마다 진달래꽃이 고개를 내밀었고 하늘엔 양털구름이 높게 떴다. 참꽃을 따서 씹던 씁쓰름한 옛 기억이 세월의 프라이팬에 잘 지져졌는지 달콤하고 보기 좋은 화전의 맛으로 추억된다.
노적산 옆구리를 끼고돌던 영남길은 소롱골 고개에서 봉두산 자락으로 올라선다. 어느 천박스러운 길손들이 버렸는지 소롱골 고갯길 옆 여기저기에 페트병, 빈 박스, 낡은 유모차 등 온갖 쓰레기들이 널브러져 있어 눈살이 찌푸려진다.
봉두산을 지나는 영남길은 푹신한 흙길이라 걷기에 더없이 편하다. 토끼 한 마리가 산길 옆에서 봄볕을 즐기다가 능선 위로 줄달음치고 호랑나비 한 마리는 날개를 가볍게 나풀거리며 숲으로 날아간다. 산객들도 적지 않다. 노부부 한 쌍, MTB족 예닐곱 명, 강아지를 앞세운 아저씨, 젊은 커플 등이 마주쳐 지나갔다.
노란 개나리 연분홍 진달래가 핀 봉두산 자락과 능선은 온통 망자들의 안식처다. 해발 220미터 봉두산 정상 바로 옆에도 무덤 하나가 자리하는데 정상 아래 봉분 없이 서있던 '해주 오공 ㅇㅇ지묘'라 적힌 비석의 주인이지 싶다.
호젓한 능선으로 이어지던 영남길은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고운 고림중학교 뒤 산자락으로 내려선다. 영남길은 양지천과 금학천이 경안천으로 안겨드는 곳으로 발길을 안내하고 용인 종합운동장 옆 양지천에는 마른 억새가 봄바람에 하늘댄다.
양지천을 건너 접어든 경안천변을 따라 도열한 벚꽃이 장관이고, 양산을 받쳐 든 노파는 냉이를 캐고, 보 위에는 가마우지 한 마리가 미동도 없이 물속을 응시한다. 경안천을 뒤로하고 용인시 중심부를 흐르는 금학천으로 접어들었다.
금학천 초입 오른쪽에 공중 높이 솟아 있는 에버라인 운동장•송담대역 역사가 마치 은하철도의 정거장 같다. 천변로 왼쪽으로 용인중앙시장을 알리는 독특한 디자인의 표지가 눈길을 잡는다. 고려 때 '김량'이라는 사람이 처음 터를 잡고 장사를 시작하며 형성되었다는 김량장, 520여 개 점포가 들어서 있다는 이 시장은 '용인중앙시장'으로 이름이 바뀐 용인의 최대 상설시장이다.
시장 옆을 지날 때 예상한 대로 정오가 한참 지나 점심을 들기에 딱 좋은 시각이다. 이 지역을 찾는 탐방객들이 놓치지 않고 찾는다는 백암순대, 그 맛이 궁금했다. 조선시대 본고장이던 죽성(현 안성 죽산) 지역이 퇴조하면서 인근 백암의 오일장을 통해 그 전통을 이어왔다는 백암순대, 오일장 장터의 평범한 음식이 외지인들을 불러들이는 한 지역의 대표 향토음식으로 거듭났으니 대견하다.
족발과 순대를 파는 식당들이 쭉 늘어선 골목으로 접어들어 '평*집' 식당 문을 들어서서 등산화를 벗고 자리를 잡았다. 평상 네 개가 놓인 작은 식당은 빈자리가 날 때마다 삼삼오오 손님이 들어오고, 손님들은 족발, 순댓국, 술국 등을 주문하고 서로 잔을 나눈다.
후추와 양념장을 얹어 뚝배기에 내오는 순댓국은 먹음직스러운 외양처럼 맛이 있고 순대와 함께 넣은 부속 고기도 양이 많다. 선지가 많이 들어가는 병천 순댓국에 비해 특유의 냄새가 거의 없고 맛이 담백하다. K사의 '6시 내 고향' S사의 '생방송 투데이' 등 공영방송을 탄 맛집이라고 한다. 옆집과 그 옆집들도 맛은 대동소이하지 싶다.
무릎 높이 얕은 물속에 잉어 떼가 유유히 헤엄치는 금학천을 따라 김량장 역과 명지대 역을 지나 용인시청 역으로 걸어간다. 김량장 역 부근에서는 금학천 천변로를 벗어나 공원처럼 꾸며진 대로 옆 인도로 걸어도 좋을 듯하다. 피아노곡 클래식 음악이 은은히 흐르는 산뜻하고 깨끗한 공중 화장실이 인상적이다. 경전철 에버라인은 대도시 외곽 중소도시에 적합한 무공해 교통의 모범적 전형으로 보인다.
시청 시의회 문화예술원 처인구 보건소 청소년수련관 녹인 복지관 등이 한 곳에 모인 용인문화복지행정타운, 건축에는 문외한이지만 범상치 않은 규모와 디자인에 더하여 접근성과 편의성이 탁월한 흔히 볼 수 없는 훌륭한 건축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행정타운 주변은 벚꽃이 만발했고, 청소년 수련관 앞 공터에서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열린다는 벼룩시장이 섰다. 저마다 종류별로 가져온 물건들을 자릿세 1천 원 좌판에 펼쳐놓은 지역주민들은 물건 판매에는 관심이 없고 서로 잡담과 차를 나누며 화창한 봄날을 만끽하고 있는 듯 보인다.
처인구 보건소 옆 영남길 제4구간과 제5구간이 교차하는 석성산 자락에 놓인 스탬프대에서 '영남길 용인시청' 스탬프를 지도에 꾹 눌러 찍으며 오늘의 미션을 클리어한다. 여전히 하늘엔 양털구름이 떴고 꽃들의 봄 잔치도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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