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따라 걷기

[영남길 6구간]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 은이성지와 문수산 마애불

인산(仁山) 2024. 8. 21. 13:22

오랜만에 하늘이 본래의 제 색깔을 찾은 맑은 날이다. 야탑에서 7:35발 진천행 시외버스에 올라 백암 터미널로 향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차창 밖 백운산 줄기 위에 갓 보름이 지난 부푼 달이 어슴푸레한 얼굴로 수줍은 듯 인사를 건넨다.


영동고속도로 양지 IC로 내려서서 은이 성지 법륜사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을 스쳐 지난다. 백암에서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원삼면 독성리로 향했다. 반듯한 백암 초교 교정에 자리한 세종대왕과 신사임당 동상이 가지런하다. 독성 2리에서 덜컹대는 미니버스에서 내려 영남길 제7구간을 뒤로하고 제6구간 서울방향으로 발을 옮긴다.

구봉산 수정산 칠봉산 문수산 등 산군(山群)이 멀찍이 물러서서 마을과 너른 들판을 둘러싸고 있다. 물이 넉넉히 고인 들판은 풍년을 기약하는 듯하고 까치와 까마귀들은 목청 높여 야단스레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삼거리에서 포장도로로 직진을 하다가 제 길로 되돌아와서 산길로 올라섰다. 평이한 길로만 가려는 안이한 습성은 새로운 비전과 발전을 가로막고 때론 잘못된 길로 들게도 하니 경계해야 마땅하다. 또 어디에 처하든 주변을 살피지 않으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딱따구리가 마른나무를 쪼기에 바쁘다. 마른 풀숲에서 인기척에 놀란 비둘기 한 쌍이 날아오르고, 구릉 아래 솔밭에서 꿩이 꿕- 꿕- 요란히 소리와 함께 날개를 퍼득이며 자리를 옮겨 앉는다.

띄엄띄엄 자리한 농가들과 논밭 사이로 난 길을 지나고 낮은 언덕을 오르내리는 구릉지대가 연속된다. 얕은 산을 내려와 한적한 농가 주변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견공들이 낯선 발걸음을 경계하며 충성심을 경쟁하듯 컹컹컹 사납게 짖어 댄다.

언덕 양지바른 곳곳에 어김없이 들어앉은 유택에서는 망자들이 짧은 이생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전해오는 '생거진천 사거용인' 설화의 내용과는 다르지만 어쩌면 얕은 구릉지대가 많은 용인의 지형은 천년 유택으로 안성맞춤이지 싶다.

 

팔월이면 연꽃이 만발한다는 내동마을 앞 너른 논에 반쯤 녹은 살얼음이 바람에 흔들린다. 물이 그득한 논, 마른 연 줄기 사이와 논두렁에서 야생 오리들이 물질을 하거나 앉아서 햇볕을 즐기고 있다. 이방인의 발걸음에 놀랐는지 가끔씩 꽥꽥 소리를 지르며 날아오르는 모습이 볼만하다. 내동마을은 그야말로 야생오리들의 낙원이다.

마을 표지판이 서 있는 마을 입구에 늙은 버들 한그루가 여인이 긴 머리칼을 빗질하듯 가느다란 가지를 길게 널어 뜨리고 서있다. 파릇한 연둣빛 잎사귀들이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뒤에서 울려 퍼지는 내동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용인농업기술센터와 농촌테마파크 앞을 지나 도로 오른편 문수산 자락에 안긴 법륜사로 들어섰다. 법륜사는 승가사 스님이던 상륜 스님이 관세음보살을 현몽하고 1996년 착공해서 2005년에 개원한 비구니 사찰이라고 한다.

대웅전 관음전 산신각 조사전 적묵당 범종각 등이 들어선 제법 규모 있는 사찰로 템플스테이도 운영한단다. 황금빛 높은 첨탑을 가진 '아(亞)'자 형태의 대웅전과 53톤 통돌로 조성한 석가모니불이 인상적이다. 고려 때 것으로 추정되는 관음전 앞 삼층석탑은 서울 구로동 어느 가정집에 옮겨왔다고 한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마침 법당에서 '깨달음이 있는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마하반야 바라밀다 심경의 끝 소절이 은은히 들려온다.

아름다운 찬불가 소리를 뒤로하고 법륜사 우측 능선을 따라 문수봉으로 향한다. 얕은 능선을 지나 문수봉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바위 투성이 사면은 고산지대에나 있을 법한 산죽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난간이 있는 가파른 나무 계단을 힘겹게 오르다 보면, 큰 바위 아래 약수터와 함께 문수사지 터로 추정되는 너른 평지가 나온다.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발길을 재촉하니 정상 아래 커다란 바위 벽면에 마애보살 두 분이 나란히 서 계시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고려 전기 때 양식이라는 안내판 설명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천 년 넘는 세월을 한결같이 자리를 지켰을 두 보살을 향해 합장하고 정상으로 향한다.

정자가 자리한 해발 403.2미터 문수산 정상엔 표지석과 함께 태극기가 펄럭이는 게양대가 서있다. 산객 둘이 정자에서 인기척에 아랑곳 않고 방금 끓인 듯 한 라면에 코를 처박고 있다. 문수산에서 내려서는 북쪽 능선 위로 웅웅대며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다. 은이 성지와 미리내성지가 각각 5km여 거리라는 이정표가 있는 능선의 벤치에 앉아 배낭을 풀고 허기를 달랬다.

문수봉 북쪽으로 직진하던 능선길 앞이 홀연 뻥 뚫리며 나타나는 저수지와 산군에 둘러싸인 너른 시골의 풍경, 용인팔경 중 제3경 용담조망(龍潭眺望)이다. 용담저수지가 있는 사암리와 그 뒤로 좌항리 미평리 가재월리 등의 너른 들판이 거침없이 펼쳐진 모습에 가슴이 시원스레 뚫리는 기분이다.

법륜사 전경과 문수산 마애보살입상

문수산과 칠봉산 사이 곱든 고개는 임꺽정이 죽산 칠장사로 스승을 만나러 가다가 가짜 임꺽정과 조우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한다. 잠시 57번 도로를 따라 와우정사 쪽으로 우회할까 망설이는 마음을 돌이켜 칠봉산 자락 영남길로 따르기로 했다.

 

칠봉산 능선에 좌로 와우정사 우로 용담조망을 보며 걷는 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저번 제7구간 구봉산과 견주려는 것인지 칠봉산은 산객에게 여러 개의 봉오리를 오르내리는 수고로움을 던진다.

 

간간이 뒤돌아 보면 지나온 길이 첩첩 봉우리에 가려 아득히 멀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은 한편 설레고 한편 어디로 이어질지 궁금하다. 칠봉산 정상 300미터 아래에서 좌측 갈림길을 따라 은이 성지 쪽으로 내려간다.

칠봉산과 은이산 자락이 낮아지며 서로 만나는 곳은 성인 대건 신부의 '생전 사목활동 길이요 순교 후 유해 운구 길'이 되었다는 신덕 고개다. 망덕 애덕과 함께 삼덕 고개라 불리는 신덕 고개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해서 이민식 빈첸시오(1829-1921)가 미리내 성지로 모시고 갈 때 걸었던 구간 중 일부라고 한다.


"... 주님을 버리고 가는 영혼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천주교 이백 년 박해도 많았네..."

마티아 님이 지었다는 노래비의 아리랑 구절이 애달프다.

 

용인 시청에서부터 걸어왔다는 한 분이 집에서 손수 내려 보온병에 담아왔다는 커피 한 잔을 권한다. 뒤 따라 중년 여성 두 분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고개로 올라와서 대리석 벤치에 앉는다.


고개 너머 와우정사를 등지고 쌓인 낙엽이 바람에 날리는 신덕 고개를 뒤돌아 보며 은이 성지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내리막 길에 지팡이를 짚는 외국인 노인 한 분과 할머니 한 분이 '삼덕의 길'을 따라 힘겹게 고개를 오른다. 향주삼덕(向主三德)의 준말인 삼덕은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필요한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 덕목을 말한다고 한다.

은이산과 칠봉산에서 각각 북쪽으로 이어진 형제봉과 갈미봉 줄기 사이로 은이골이 길게 안겨있다. 계곡 깊숙이 가족 캠핑장과 별장처럼 보이는 주택들이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은이 성지는 두멍골 은이골 큰 범박골을 지나 남곡 3리 마을 회관 바로 위 형제봉 기슭에 자리한다.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의 은이(隱里),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모방 신부로부터 1836년 세례를 받고 한국 천주교회 첫 사제가 된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그가 첫 사목 생활을 한 곳이자 1846년 26세로 순교하기 전 마지막 공식 미사를 드린 곳이라고 한다.

신덕고개 위에 서있는 비석(위), 천주당 내부와 외부 모습

대건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았던 상해의 김가항 성당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천주당과 대건 신부 기념 유물전시관 내부를 찬찬히 둘러봤다. 천주당 내부 기둥과 들보 등 몇 개는 2001년 철거된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 <잃어버린 여행가방> 속에 작가가 상해 여행 중 우연찮게 김가항 천주당이 철거되기 전 열린 2001년 3월 24일 마지막 미사에 참석했다는 얘기에서 그때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곳, 두 팔을 벌린 예수님이 서계신 성지 맞은편 언덕 위에 올랐지만 기도처 14곳을 둘러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지친 발을 옮겨 영남길 제6구간의 기점이자 제5구간의 종점인 남곡리 정류장으로 향했다. 15.4km 5시간 반 코스가 20km 6시간 여로 늘어진 호젓하고 느긋한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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