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끄저께가 상강(霜降)이었다. 바야흐로 단풍이 붉게 물들고 국화도 탐스럽게 필 아름다운 시기이다. 안내산악회 버스로 곰배령 산행을 가기로 한 날인데, 10도 안팎의 기온으로 산행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복정역 1번 출구로 나오니, 많은 사람들이 등산복 차림으로 산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산악회 버스는 사당에서 출발하여 양재역을 거쳐 약속된 시간에 도착했다. '반더룽(Wanderung)은 영어의 '백패킹(backpacking)'과 유사한 의미의 독일어인데, 이 산악회의 운영자도 남과 다른 독특함을 추구하는 면이 있나 보다.
사당역에서 먼저 탑승한 친구 M이 버스 맨 뒤 좌석에서 반겨 준다. 버스는 수도권외곽순환로를 거쳐 팔당대교를 건넜다. 한강으로 내려앉는 예빈산과 검단산 산줄기 끝에 안개구름이 깔렸고, 아침 햇살은 한강 수면 위에서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다. 한강 변 6번 국도로 들어선 버스가 신양수대교 위를 지날 때, 우측 팔당호 수면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몽환적이다.
다리를 건너자, 사방 천지가 이내 안갯속으로 들어서며, 도로 난간 안쪽으로 시야가 갇혔다. 산꾼들은 안개로 덮여 조망이 없는 산정의 풍광을 흔히 '곰탕'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 버스가 곰탕 속을 잠수하는 형국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을 끼고 있는 양평은 안개의 도시다. 계절이 교차하는 시기 큰 일교차는 팔당호 부근 남한강의 아침을 하얀 물안개로 수놓곤 한다. 노래 '물안개'의 가사처럼... 수면에서 키 높이로 피어오르다 멈춰서 있는 물안개는 열병처럼 스쳐 가는 젊은 날의 꿈 갈망 고민 열정 마냥 덧없어 보인다.
"하얗게 피어나는 물안개처럼
당신은 내 가슴속에 살며시 피어났죠"
국도이지만 이동 차량이 적지 않다. 버스 승용차 트럭 등 차량의 행렬 속에 바이커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한강 변에서 멀찍한 덕평으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안갯속을 벗어났고, 하얀 물안개에 싸인 한강이 얕은 산줄기 사이에서 꿈틀대며 천 년 묵은 거대한 백사처럼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었다 한다.
홍천강을 낀 44번 국도로 바꿔 타자 다시 짙은 안개에 잠겼던 버스는 서울양양 고속도로로 올라서며 그 속에서 벗어났다. 홍천 휴게소는 인산인해다. 사람들은 삶의 활로를 찾아 불나방처럼 도시로 도시로 이주하지만, 주말이면 잠시나마 도시를 벗어나 자연으로 탈출하려는 행렬이 줄을 잇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더군다나 절정으로 치닫는 가을의 주말을 누군들 놓치고 싶겠는가!
인제 IC로 내려선 버스는 내린천로를 따라 현리를 지나고, 한석산로로 들어서서 구불구불 고도를 높여 간다. 리무진 버스의 안락한 좌석에서 눈을 붙이고 있던 산객들이 산행 가이드의 마이크 소리에 윗몸을 곧추세운다. 하루 1,150명으로 제한되는 인원, 나들목, 루트, 구간별 거리와 시간 등 곰배령 탐방 관련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자, 얼마지 않아 '설악산국립공원 점봉산 분소'가 있는 귀둔리 주차장에 도착했다.
곰배령은 설악산과 마주 보며 솟아 있는 작은 점봉산 아래 자리한 해발 1,164m의 완만하고 평원처럼 너른 능선 마루다. 탐방의 적기는 여러 들꽃이 어울려 한바탕 축제를 벌이는 봄부터 여름까지의 시기라고 한다. ‘활엽수가 이룬 극상의 원시림’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산림청으로부터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었지만, 제철이 아니어서 점봉산의 진면목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버스의 문이 열리자, 짐칸에서 배낭을 꺼내어 짊어진 산객들은 꽃을 쫓는 꿀벌처럼 서둘러 '곰배골 해발 550m'라 쓰인 표지석이 서 있는 들머리를 지나 곰배령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곰재골 표지석 맞은편의 안내도의 산행 코스는 이쪽과 반대편 강선리에서 곰배령까지 오르는 두 개로 단순하다. 해발 1426m 점봉산 정상은 곰배령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생태복원을 위해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한반도 자생종의 20%에 해당하는 854종의 식물이 자라는 유네스코 지정 '생물권 보존구역'이니, 각별한 보존 노력이 필요할 만도 하다.
산악회에서 사전 예약을 해 둔 터라 아무런 제재 없이 들머리로 들어섰다. 등로는 좌측의 작은 점봉산의 줄기와 우측의 가칠봉에서 뻗어 내린 한 줄기 사이 좁은 계곡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초입부터 얼마 간 이어지던 산책로처럼 평이한 등로는, 들머리에서 약 1.5km 거리 해발 700m 지점에 나무벤치와 탁자가 놓인 첫 번째 쉼터를 내놓는다. 첫 번째 쉼터를 지나면서 등로는 해발 900m 두 번째 쉼터와 곰배령 능선으로 고도를 높여 간다.
들머리에서 약 3km 지점에 두 번째 쉼터가 벤치와 의자를 내놓고 기다린다. 산행 시작부터 우렁찬 물소리로 산객과 동행하던 계곡과 하산 길을 기약하며 잠시 작별하고, 0.9km 거리 곰배령 능선 마루를 향해 가파른 비탈로 발을 옮긴다.
산악회의 '단풍 산행'이라는 글귀가 이번 산행을 부추겼지만, 정작 참나무 등 활엽수들은 대부분 잎사귀를 다 떨구고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듬성듬성 성긴 숲 사이로 난 등로는, 때 이르게 가을이 지나간 듯 일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반면, 비교적 짧은 산행 코스에 주어진 시간도 넉넉하여, 시간에 쫓기지 않고 계곡을 친구 삼아 산행인 듯 산책인 듯 느긋하게 걷는, 진정한 힐링 산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머리 위 성긴 숲 사이로 보이던 능선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곰이 배를 드러내고 드러누워 있는 형상을 닮았다는 곰배령, 그 너른 능선 마루로 올라섰다. 해발 550m 곰배골에서 해발 1,164m 곰배령까지 약 4km 거리에 소요된 시간은 한 시간 반 남짓이다.
원추형 봉우리를 봉긋 세운 작은 점봉산을 배경으로, 드넓은 곰배령 초원이 치맛자락을 펼친 듯 하늘을 향해 누워 있다. 초원은 봄과 여름이면 만발했을 온갖 들꽃 대신에 붉그레한 가을빛으로 물든 들풀만 성성하다. 그 모습은 표지석에 적힌 '천상의 화원'이라는 글귀가 무색하다.
배를 하늘로 드러낸 채 드러누운 모양의 곰배령 표지석으로 내놓은 나무 데크를 따라 산객들이 길게 줄을 서있다. 그 줄의 끝에 서서 인증 숏을 남길 차례를 기다린다. 우리 뒤로도 연이어 올라오는 산객들이 줄지어 선다.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여성 산객은 서울에서 홀로 차를 몰아 달려왔다고 한다. 이곳만 스무 번 정도 찾아왔다고 하니, 곰배령 마니아인 셈이다. 곰배령 서편,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푸른빛을 내보이는 하늘 아래 펼쳐진 탁 트인 파노라마가 장쾌하다. 제법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명치를 답답하게 누르고 있던 덩어리가 뻥 뚫리는 느낌이다. 저마다 이곳을 찾는 이유가 있겠거니와, 이런 느낌 때문에 이곳을 찾아오는지도 모를 일이다.
기실 곰배령을 찾은 이유는 '천상의 화원'이라는 자자한 명성에 더하여, 산림청 지정 100대 명산에 속하는 점봉산을 지척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곰배령 나름의 매력을 발견하는 산행이기도 하다.
강선마을에서 올라온 산객들은 곰배령 갈림길에서 가칠봉 능선을 살짝 거쳐서, 철쭉과 주목 군락지를 지나는 루트로 하산을 할 것이다. 곰배령이 한눈에 들어오는 가칠봉 능선 쪽 너른 쉼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준비해 온 음식을 들며 시원스러운 곰배령 장관을 음미하고 있다.
우리는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야 하는 원점회귀 산행이다. 때 이르다 싶게 낙엽이 진 숲 사이로 난 자갈길, 바위 너덜길, 질퍽한 물웅덩이 길 등을 번갈아 지난다. 수량이 풍부한 계곡은 크고 작은 폭포를 내놓으며 길동무를 해준다. 귀둔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예정된 출발 시각까지 한 시간 여가 남아 있다.
오후 세 시경, 버스는 귀로에 올랐다. 서울 쪽으로 돌아오는 길도 서울양양고속도로는 정체가 심하다. 다섯 시 반경 일몰 시각 즈음 남양주의 경계로 들어선 버스는 미사대교를 건너며 서울의 경계로 들어섰다. 이른 아침 남한강의 황홀한 광경을 연출하던 태양이, 서녘 하늘과 한강을 온통 선연한 핏빛으로 물들이며 하루를 마감하려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천상의 화원' 못지않은 '지상의 파라다이스' 다운 장관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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