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전야 시간은 자정으로 향한다. 신사 전철역, 생기 넘치는 젊은이들 틈에 등산복 차림 배낭을 멘 산객들이 하나 둘 눈에 띈다. 친구 M과 만나 전철역 부근에서 출발하는 무박이일 산행 버스에 올랐다. 이번 산행 테마는 북에서 남진하는 가을 '단풍산행'에 대비되는 남에서 북진하는 봄 '철쭉 산행'이다.
몇몇 등산동호회에서 운영하는 전세버스 산행을 친구들과 서너 번 이용했었다. 주로 전국 각지 명산이나 눈, 꽃, 억새 등 계절별 테마별로 운영되는 금요 무박, 토요 당일 등 산행은 소확행을 추구하는 주말족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위안이다.
대부분 장년을 지나 노년의 골짜기로 내려서는 분들과 일단의 젊은이 등 버스는 만원이다. 서울 강남 한복판을 출발한 버스의 목적지는 보성군 웅치면 제암산 자락 자연휴양림이다. '산토끼' 산행대장의 안내로 이내 버스는 취침 모드다.
좁은 좌석에 앉아 비몽사몽 400여 킬로미터 네 시간 여의 불편한 여정에 '내가 미쳤지'라는 말이 터져 나올 듯하다.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가 아니라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닐터인데.
네 시 조금 넘어 도착한 휴양림, 공기는 청량하고 하늘엔 별들이 멀지만 총총하다. 어둠에 잠든 휴양림 숙박촌의 호수같이 잔잔한 정적에 작은 조약돌을 던지듯 소쩍새 소리만 간간이 들려온다. 버스에서 내린 산객들은 동행과 끼리끼리 삼삼오오 모여 헤드랜턴을 켜고 스틱을 펴고 신발끈도 조이는 등 서둘러 산행에 들 채비를 한다.
산행 코스는 휴양림을 출발하여 제암산, 곰재, 사자산, 골치, 골치산, 일림산을 거쳐 용추폭포 주차장으로 내려서는 약 16km다. 어둠에 묻혀 희미한 숙박촌의 들머리를 렌턴 불빛으로 더듬어 찾아서 들어섰다. 산 허리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오르다가 산정 방향 쪽으로 직진하기를 번갈아 한다. 바람 소리, 일찍 잠에서 깬 부지런한 산새 소리, 산객들의 숨소리, 그리고 스틱 내딛는 소리가 어둠을 깨친다.
고도가 높아지자 산 아래 모내기 준비로 물이 그득한 너른 평야가 농가의 불빛들과 함께 여명에 부스스 눈을 뜨려 하고 있다. 일출까지는 시간이 여유롭지만 동편 산줄기 위로는 벌써 붉그스레한 빛이 감돈다.
들머리에서 2km 남짓 거리의 정상 부근의 가파른 바윗길을 올라서면 제암산 정상이 어둠이 걷힌 하늘 아래 위용을 드러낸다. 제(帝) 자 모양 3층 형태로 우뚝 솟아 임금바위로도 불린다는 해발 807미터 제암산 정상, '올라가실 때 각별히 주의하세요.'라던 산행대장의 말이 실감 난다.
절벽 틈새를 붙잡고 기어올라 마당처럼 넓은 정상에 서면 사방 가장자리는 깎아지른 절벽이고 바람은 거침없이 거세다. 마침 멀리서 태양이 얼굴을 내밀어 어렴풋하게 윤곽만 보이던 산하가 장관을 펼치며 또렷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출과 어우러진 절벽 위 거대한 암봉에서의 장관에 취한 산객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 대며 자리를 뜰 줄을 모른다. 날이 맑으면 주위의 천관산 월출산 무등산 팔영산 등 호남의 명산들이 눈에 들어온다지만 방향과 모습으로 미루어 남쪽의 천관산과 서쪽으로 월출산만 가늠해볼 따름이다.
제암산을 뒤로하고 곰재로 향하면서 암봉 사이에 걸린 태양과 정상에 모여있는 산객들의 실루엣이 펼치는 장관이 연신 고개를 돌리게 한다. 근처 천관산, 조계산, 월출산, 두륜산, 팔영산, 무등산 등과 달리 제암산이 2002년 산림청이 선정 공표한 대한민국 100대 명산에는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아할 따름이다.
곰재로 내려가는 능선 오른편으로 장흥읍이 보이고 그 너머로 월출산은 멀리서도 준수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길은 깨져 내린 각진 바윗돌이 깔려 걷기가 수월치 않고 철쭉은 아직 만개하지 않아 아쉽다. 곰재로 내려섰다가 곰재봉을 지나고 간재와 사자산까지 이어지는 철쭉능선은 철쭉꽃이 온통 잔치를 펼쳤다.
해발 666미터 사자산은 장흥읍 쪽으로 길게 목을 뻗어 사자머리처럼 두봉을 치켜세우고 있다. 지나온 길을 굽어보면 산 허리에 연초록 치마를 걸치고 산정 쪽에 연홍빛 저고리를 입혀 놓은 듯하고, 한편 초록과 진홍실로 수를 놓은 융단이 윙윙 부는 바람에 출렁이고 있는 듯도 하다.
사자산을 뒤로하고 가파른 경사의 내리막길이 골치재까지 이어진다. 고개 그늘막에서 땀을 훔치며 숨을 골랐다. 사자산에서 일림산까지 5km여 오르내리는 긴 능선길, 평탄한 능선길 옆으로 어린 철쭉이 가지런하고 일림산 정상까지 더 넓은 철쭉 군락지가 펼쳐진다.
열 시가 조금 지나 도착한 해발 667m 일림산은 호남정맥이 제암산과 사자산을 거쳐 남해로 들어가기 직전에 솟아 있는 산이다. 북서쪽으로 사자산 제암산 남동쪽으로 율포와 득량만 해안의 장쾌한 파노라마가 한눈에 들어온다.
일림산 정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산신제에 앞서 흥을 돋우는 풍물패를 지켜보며 산과 꽃과 바다가 어우러진 장관에 빠져있다. 정상 표지석 앞에는 조율시이 수박 등 과일을 비롯해서 시루떡, 민어, 돼지머리 등이 제상을 가득 채웠고 그 앞에는 향로와 '茶香' 막걸리도 놓였다.
보성군 웅치면 산악회 주관으로 20여 년 전부터 오월 철쭉 철에 산신제를 지낸단다. 농악이 멎은 뒤 산신제가 시작되려는 일림산 정상을 뒤로하고 완만한 능선으로 내려서며 율포 성주산 자락에 잠들어 계신 장인 장모님께 멀리서나마 합장하며 인사를 올렸다.
626 고지에서 좌측 용추폭포 방향 대신 녹차밭이 있는 한치재 쪽으로 우회하는 능선길은 산죽이 길 양쪽을 빽빽이 채우고 바람도 한 점 없어 수시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걷는 다소 지루한 길이다. 용추계곡 초입 주차장으로 내려서며 산행을 마무리했다.
버스 출발시간이 넉넉해서 전남 분재대전 등이 열리고 있는 일림산 문화축제장을 지나서 용추계곡을 거슬러 발길을 옮겨본다. 계곡 위 나무다리를 건너 능선 위쪽으로 거대한 편백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빽빽이 들어서 있다.
산 위의 철쭉군락에 못지않은 장관에 감탄하며 한참을 편백 숲에 머무르다가 계곡 너럭바위에 내려앉아 발을 담가본다. 뼛속까지 시린 차가움에 긴 산행의 피로가 깨끗이 씻겨가는 듯하다. 먼 남도로의 꽃 산행을 뒤로하고 귀로에 오른다. 그 길은 아득하지만 연휴를 낀 주말이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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