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은 길고도 지리했다. 데워진 가마솥처럼 식을 줄 모르던 여름의 열기가 태풍 소식이 뜸해지자 온전히 식어버렸다. 바야흐로 계절은 낮과 밤이 몸을 섞으며 경계가 모호해지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 지나고, 완연한 가을로 들어섰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 암사역에서 M의 차량에 탑승하며 친구들과 합류했다. 저번 대암산 산행에 이어, 한 달여 만에 다 함께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 산행을 하기로 한 터였다.
서울을 벗어나며 날이 밝았지만, 짙은 안개는 백여 미터 남짓 시야를 허락할 뿐,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소백산맥을 넘기 전까지 산야를 뒤덮고 있다. 이화령을 지나서 경상북도 문경시의 경계로 들어서자, 안개의 나라에서 맑게 갠 나라로 시공을 뛰어넘어 날아온 듯 안개는 자취를 감추었다.
왕복 4차선 새재로를 따라 '문경새재' 패루를 지나고, 문경새재도립공원 제2주차장에 도착했다. 등산화 끈을 조이고, 스틱을 펴고, 배낭을 메는 등 산행 채비를 하고, 문경새제의 제1관인 주흘(主屹關) 쪽으로 여유롭게 발길을 옮긴다. 새재로는 왕복 2차선으로 좁아졌고, 그 좌측엔 넓은 주차장이 자리하고 우측엔 식당들이 줄지어 섰다.
좌우로 문경새재아리랑비, 선비 동상, 옛길박물관 등을 스쳐 지난다. 읊조리듯 느리고 진한 애환이 묻어나는 새재 아리랑 곡조가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문경새재 물박달 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
문경 새재 넘어를 갈 제
굽이 굽이 눈물이 난다."
이어 오른편 너른 잔디밭이 나오는데, 그 한편에 조성해 놓은 사과밭에 주렁주렁 매달린 빨갛게 익은 사과가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잔디밭에 설치한 'SAEJAE' 이니셜에서 함께 사진 한 장을 남기고, 잔듸밭 가장자리 주흘교를 건너니, 양쪽으로 성채를 거느린 주흘관이 당당하게 협곡을 가로막고 서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도(官道)였던 문경새재길은 이곳 제1 관문인 주흘관을 시작으로, 좌우 조령산과 주흘산 사이로 난 좁은 계곡길을 따라 제2 관문 조곡관과 제3 관문인 조령관으로 이어질 것이다.
숙종 때인 1708년 세워졌다는 주흘관을 통과하니, 오른편에 여궁폭포를 거쳐 주봉으로 오르는 들머리가 나온다. 오늘 산행은 조령 제1 관문에서 출발하여, 여궁폭포 -혜국사 - 주봉 - 영봉 - 부봉의 제1~6봉 - 새재길을 거쳐 원점으로 회귀하는 약 20km 코스로, 8시간 전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들머리의 고도는 250여 미터로 해발 1,076미터 주봉과 해발 1,106미터 영봉과는 고도 차이가 800여 미터나 되어 호락호락하지 않은 산행이 되리라 예견된다.
계곡을 끼고 이어지던 산행 초입의 평탄한 등로는 너덜길로 바뀌며 경사도 차츰 가팔라진다. 해발 300미터쯤에서 여궁폭포가 낙차 큰 좁은 암곡 사이로 20여 미터 물줄기를 내리치며 눈길과 발길을 멈추게 한다. 여인의 하반신을 닮았다는 폭포는 그 밑에 비췻빛이 감도는 아담한 소(沼)를 만들어 놓았는데, 하늘에서 일곱 선녀가 내려와서 목욕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등로는 폭포 아래쪽 계곡 위로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서, 좌측으로 휘돌아 폭포 위 뒤쪽 계곡으로 이어진다. 너덜 길을 지나고, 계곡 위에 걸린 나무다리를 건너고, 비탈에 놓인 나무 계단도 오르며, 발아래로 굽어 보이는 좁고 깊은 계곡의 크고 작은 폭포에 눈과 귀를 빼앗기다 보니, 땀은 배어 나오지만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는 느낌이 든다.
등로가 계곡과 헤어져 주봉 쪽으로 꺾이는 지점, 계곡 건너편에 혜국사가 자리한다. 주봉 쪽으로 직행하는 M을 제외한 셋은 아치형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 혜국사 경내로 인도하는 반듯하고 가파른 돌계단을 올랐다. 털빛 고운 진돗개가 꼬리를 살랑대며 반기는 제하당 마당을 지나, 자하교로 난 돌계단을 오르니 대웅전 뜨락이다.
혜국사(惠國寺)는 신라 문성왕 때인 846년 체징(體澄) 스님이 창건했는데, 고려 말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이 이곳으로 피난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청허(淸虛) 송운(松雲) 기허(騎虛) 등 스님이 이 절에 머물며 승병을 지도했다고 한다.
아담한 크기의 대웅전에는 아미타불이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협시를 받으며 자리한다. 대웅전 뒤편 산신각으로 오르니, 겹겹 뻗어 내린 산줄기가 수렴하는 골이 멀리까지 뻗친 모습이 굽어 보인다. 그 장관이 문득 11년 전 일박이일 워크숍 때 이 자리에 섰던 기억을 되살려 준다. 꼬리를 흔들며 마당 가장자리 계단까지 배웅하는 진돗개를 뒤로하고, 혜국사 경내를 빠져나온 일행은 앞서간 M을 쫓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능선 마루로 오르는 등로는 넓고 쾌적하지만, 순풍에 돛단배 가듯 마냥 편안한 길만은 아니다. 해발 700미터쯤, 등로 옆에 보랏빛 꽃무늬 융단을 깐듯 꽃향유 군락이 나타나 한동안 눈길을 붙잡았다. 해발 844미터 등로 옆에서는 쉬어가라는 듯 약수터가 발길을 붙잡는다. 주둥이 아래 놓은 석재 물받이에 '주흘산 백 번 오르니, 이 아니 즐거우랴'라는 각자가 새겨진 약수터의 약수를 한 주걱 들이키니 갈증이 말끔히 가신다.
작은 잎사귀 활엽수가 듬성듬성한 숲 사이, 폐타이어 깔판이 깔린 나무 계단이 하늘로 오르는 긴 사다리처럼 능선 위로 놓여 있다. 지루하리만치 길게 이어지는 계단을 한 발 한 발 밟으며 오르자, 고도 천 미터쯤의 능선 마루에 닿았다. 주흘산의 주봉과 영봉 사이 주 능선으로 올라선 것이다. 평탄한 능선을 따라 우측 500미터 지점에 주봉이 우뚝 솟아 있는데, 주봉은 턱밑에 서 있는 이정표가 영봉으로 가는 갈림길을 알린다.
주봉, 영봉, 그리고 부봉
산행을 시작한 지 약 세 시간 만에 계단을 주흘산 주봉으로 올라섰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지날 때면, 멀리 우뚝 솟아 준수하고 위엄스러운 자태를 자랑하던 봉우리가 필시 관봉과 주봉이었으리라. 주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관봉과 갈비봉의 능선이 끝나는 자락에 펼쳐 놓은 문경읍이 한눈에 들어온다. 허리 높이 주봉 정상 표지석 주위를 맴돌며, 산정에서의 쾌감을 한참 동안 만끽했다.
주봉에서 영봉까지는 우측에 천애 절벽을 끼고 평탄하게 뻗은 흙길 능선으로, 1.2 km가량 이어진다. 조망이 없다가 영봉이 가까워질 무렵, 우측 앞쪽으로 흰 구름이 피어오른 하늘과 경계를 긋고 있는 포암산 등 월악산 남쪽의 산군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제2 관문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나면, 영봉(靈峰)이 30미터 앞에 봉우리를 치켜세우고 있다. 해발 1,106미터 영봉은 주흘산의 최고 높은 봉우리이지만, 별다른 조망이 없어 주봉(主峰)의 명칭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영봉에서 다음 봉우리인 부봉(釜峰)까지는 2km 거리다. 그 중간 지점쯤에 하늘재로 내려가는 갈림길 이정표가 놓여있다. 해발 525m 하늘재는 신라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156년 개척한 우리나라 최초로 개통된 고갯길이라고 한다. 고구려와 신라가 끈질긴 전쟁을 벌였고,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몽진(蒙塵)할 때 이용했던, 군사와 교통의 요지였던 하늘재는 조선 태종 때 열린 새재길에 주역의 자리를 내주었다고 한다.
오늘 산행 코스는 역 디귿자 모양으로 주흘산 주 능선을 휘도는데, 영봉에서 부봉으로 가는 능선길은 전망이 트이면서, 새재길 건너편 조령산 신선봉 깃대봉 등을 비롯한, 앞쪽의 부봉(釜峰) 여러 봉우리를 보여준다. 등로 앞과 좌우에 나타나는 우뚝우뚝 솟은 큰 바위들의 숲을 헤치며 지나고, 평탄한 데크 길과 급전직하 가파른 계단을 따라 해발 848미터 부봉 삼거리 안부로 내려섰다.
안부에 서 있는 하늘재와 마패봉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를 뒤로하고, 부봉으로 오르는 긴 철계단으로 발을 내디딘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해발 917미터 부봉에 올라서니, 맞은편 방향에서 올라온 남녀 산객 두 분이 휴식을 하고 있다.
부봉(釜峰) 제1봉은 시야가 트여 북서쪽으로 월악산의 영봉 만수봉 포암산 등 산군을 비롯한, 주흘산의 영봉과 주봉 등 지나온 봉우리들을 조망할 수 있다. 부봉 1~6봉은 서로 깊게 내려가는 안부를 끼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리한다. 부봉 2봉과 3봉의 안부로 내려가는 비탈은 3, 4, 5봉과 멀리 조령산 신선봉 등을 눈앞에 펼쳐 보인다. 바로 앞에 솟아 있는 3봉은 바위 봉우리 군데군데 틈새에 소나무가 자란 모습이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마주하고 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넉넉하고 사방이 모두 조망되는 3봉으로 올라섰다. 별다른 조망이 없는 제2봉과는 달리, 제3봉은 농구 코트 크기의 널찍한 너럭바위 봉우리에 사방이 탁 트인 조망을 선사한다. 자연인 풍의 노 산객 한 분이 맨발로 넓은 봉우리의 주인인 듯 유유자적 노닐고 있다. 주흘산 산행의 백미로 꼽을 만한 이곳 부봉 3봉에 올라서면, 그 누구든지 멀리 눈이 닿는 땅과 하늘, 불어오는 바람과 가슴에 솟는 감흥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르는 등로가 보이지 않고 험준해 보이는 4봉을 우회해서 지나고, 5봉이 내어준 뾰쪽 바위 위에서 4봉을 조망했다. 앞쪽에는 부봉의 막내이자 이번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이기도 한 부봉 6봉에 올라서니, 마패봉 깃대봉 신선대 조령산 등 새재길 건너편 산군이 눈앞으로 생생하게 더 가까이 다가오며 자태를 뽐낸다.
주흘산의 여덟 개 봉우리를 거쳐 새재길로의 하산길에 접어들었다. 건너편 산군을 굽어보고, 너럭바위 위를 지나고, 조릿대 융단 길도 지나며, 저마다 마음속으로 산행의 감흥을 갈무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동행이 산행 중에 주고받는 대화의 단골 주제 가운데 하나가 '건강'이다. 누구나 은퇴를 하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몸이 각종 터러블을 일으키게 되고, 그에 따라 자연히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사탕 하나에 마음이 움직이던 어린 아이가 나이가 들수록 친구, 사랑, 돈, 정욕, 명예 등으로 관심과 집착이 옮겨 가게 마련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이 있지만, 막상 닥치기 전에는 건강의 소중함을 잊고 지내기 십상이다.
어떤 대상에 관심을 두고 집착하게 되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결핍이나 상실, 또는 상실에 대한 불안에서 말미암지 싶다. 길은 두 번 세 번 여러 번 갈 수 있지만, 나이라는 길은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초행의 길이다. 현실화되지 않은 불안은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하지만, 결핍이나 상실에서 오는 집착은 질긴 고래 심줄처럼 끊어내기가 어렵다. 결핍과 상실의 감정을 품은 사람이 많으면 건강한 사회나 국가라고 할 수 없다. 관심과 집착의 단계를 넘어서, 허무와 무관심의 단계로 몰아넣은 우리의 정치는 좋은 정치에 대한 극한의 갈증과 결핍의 증거이기도 하다.
잡을 수 없는 신기루처럼 마패봉과 깃대봉 사이에 있는 골에 숨어 있는 문경새재 제3 관문 조령관이 저 멀리서 잠깐 모습을 보여 준다. 조령관 아래쪽 동화원 휴게소 부근의 새재길로 내려섰다. 단단하고 평평한 황톳길은 조곡천을 따라 내려가며 조곡관, 교귀정, 조령원터,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을 거쳐 '영남 제1 관문'인 주흘관으로 인도한다.
오후 여섯 시가 조금 지났을 뿐이지만, 주흘관 아래 상초리 마을의 식당들은 모두 하루 영업을 마감하고 있다. 시골 관광촌 마을도 일과 여가의 조화를 추구하는 바람직한 세태의 흐름을 좇아가는 것이겠거니 했다. 아담하고 인적이 적은 새재 너머 연풍휴게소에서 '지장 막걸리'를 반주 삼아 보채는 허기를 달랬다. 우리 일행을 태운 M의 넥소는 교교한 상현달 달빛을 받으며 조령산 자락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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