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따라 걷기

[영남길 9구간] 죽산 성지 순례길

인산(仁山) 2024. 8. 22. 09:25

 

영남길 제10구간을 거슬러 제9구간과의 교차점인 안성시 죽산면 금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죽산면까지 9.9km는 '죽산 성지 순례길'이다. 금산교회 옆 축사를 가득 채운 크고 순한 눈망울의 소들이 먹이통 앞으로 고개를 내밀고 어린 송아지들은 낯선 발소리를 경계하며 안쪽 벽으로 물러선다.

 

청풍쉼터 건너편 망이산 자락 능선으로 올라 쓰러진 나무둥치에 걸터앉아 허기를 달래 본다. 한적한 농촌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번듯한 건물의 안성ㅇㅇ 기숙학원엔 젊은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싱그럽다. 그 앞 판교 노인회관 옆에서 마른풀 태우는 연기 냄새는 향기롭다.

현풍 곽 씨 충효각이 있는 광천마을을 가로질러 청미천으로 흘러드는 화봉천에는 야생 오리 한 쌍이 정겹게 헤엄친다. 눈에 띄는 경계도 없이 이웃한 장암마을은 장군 안동 문간 벼락 멍석 등 갖가지 이름의 바위들이 있는 동네란다.

 

얕은 언덕에 자리한 아담한 2층 건물의 장암초교 교정을 둘러봤다. 38회에 걸쳐 174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8년 이웃 일죽 초교로 통합되면서 폐교되었단다.

중부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 펼쳐지는 너른 논밭 건너 멀리 낯익은 죽주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그 왼편으로 팔공산 자락에 자리한 죽산 순교성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성지로 발길을 재촉했다. 언덕 위에서 두 팔을 크게 벌린 예수님상이 맞아준다. 웅장한 영성관, 소담한 소성당과 사제관 앞을 차례로 지나고,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간 길을 조각상으로 재현해 놓은 '십자가의 길 묵상 14처'를 천천히 걸었다.

 
 

 

매화 복사꽃 벚꽃 등 온갖 꽃들이 앞다투어 피는 봄, 유월절 최후의 만찬 다음날 고난을 겪은 예수, 그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걸었을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는 지금쯤 어떤 꽃들이 만발했을까?

1866년 병인박해를 시작으로 수년간 이어진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 이곳 묘역에는 믿음을 증거 한 대가로 목숨을 빼앗긴 문 막달레나, 김도민고 등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 25명과 천여 명으로 추정된다는 무명 순교자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리라 <시편 126:5>"

 

무명 순교자 묘역의 성경 구절이 가슴을 울린다. 죽산성지에서 논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면 소재지로 향한다. 예수님이 걸어간 고난의 십자가 길처럼 150여 년 전 순교자들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며 걸었을지도 모를 길이다.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죽산성지, 천주교인 박해로 야기된 병인양요, 그 전쟁에서 프랑스 군과 맞선 어재연 장군, 이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인 영남길 제9구간과 제10구간이 우연의 일치인지 나란히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의아하면서 한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심한 백로 한 마리가 완주를 축하라도 해주려는 듯 논두렁 옆 수로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큰 날개를 활짝 펴며 들 한가운데로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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