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면 황새울 마을에서 영남길 제7구간 구봉산길이 끝나고 제8구간 죽주산성길이 시작된다. 사방이 툭 트인 벌판의 개울을 따라 난 길을 걷고 얕은 구릉을 빗겨 가고 묘목이 자라는 비닐하우스와 축사 옆을 지나고 작은 고개를 넘어섰다. 율곡천이 청미천으로 흘러들기 전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 길은 용인과 안성의 경계를 넘는다.
농사 준비로 바쁜 안성 삼죽면 내장리의 너른 들길을 가로질러 멀리 비봉산과 그 품에 안긴 봉정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팔트가 깔린 경사진 길을 올라 봉정사에 들렀다가 우측 기슭을 휘돌아 해발 372미터 비봉산 정상에 올랐다. 남쪽으로 남산과의 사이에 널찍하게 자리한 죽산면 마을이 펼쳐져 있다.
동쪽으로 난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1236년 죽주 방호별감 송문주 장군이 몽골군과의 15일간 전투에서 승리한 죽주산성이 맞이한다. 중성 외성 내성이 각각 차례로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축성된 것이라 한다. 가파른 가장자리를 따라 쌓은 약 1.7km에 달하는 성은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천연의 요새답다.
죽산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 시간에 맞추려 발길을 서둘렀다. 고려 때 조성된 미륵당 누각 안 '태평미륵'이라 불리는 5.6미터 매산리 석불입상은 모습이 온전하다. 고려시대 경기 3대 사찰로 태조 왕건의 초상화를 봉안했던 봉읍사, 그 옛터에 남아있는 오층석탑과 당간지주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죽산삼거리에 서있는 송문주 장군의 동상이 늠름하다. 죽주산성 아래 사찰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가 온 들판에 은은히 울려퍼지고 멀리 논두렁 태우는 연기는 희미하게 피어오른다.
죽산면 소재지로 들어서며 영남길 제8구간 걷기를 마쳤다. 말 그대로 '영남길 최고의 풍광' 제7구간을 가로지르고, 넉넉하고 한적한 들판을 지나 죽주산성으로 이어지는 제8구간 영남길 두 구간을 걷는 여정이 힘겨웠다.
집에 도착해서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발바닥을 보니 양쪽 모두 엄지 발가락 아래 발바닥에 물집이 크게 잡혔다. 여덟 시간 넘게 거의 30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곰곰 생각해 보니 수많은 얘기와 전설을 간직한 이 길을 주마간산 격으로 서둘러 지나온 것이 아쉽다.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있듯 빠르다고 해서 결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산을 '정복'하려 산정에 서는 것에 의미를 두다 보면 그 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지 않은 길은 다음을 위해 남겨 두면 그만이고, 설령 가지 못한다 해도 그 누구에게 해가 되거나 스스로에게 허물이 될 리도 만무할 터이니 말이다. 이번 탐방을 마치며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인 술이 향그럽듯 탐방길도 느릿느릿 찬찬히 둘러봐야 제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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