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절기 상강(霜降)이 지나고 입동(立冬)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가을이 다 지나가기 전에 단풍 산행 계획을 잡고 십일월 첫 주말을 손꼽아 기다렸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친구 두 명과 함께 이른 아침 포항 시내에서 30km 남짓 거리의 내연산 보경사를 향해 출발했다. 시내를 벗어나 7번 국도로 접어들어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렸다. 내연산 품속에서 흘러나와 동해로 안겨드는 광천 옆 2차선 도로로 내려서서 십여 리를 더 달리니 내연산 자락에 안긴 천년 고찰 보경사에 닿았다.
보경사를 출발하여 열 두 폭포로 유명한 내연산의 광천 계곡 북측의 문수봉, 삼지봉, 향로봉 능선을 거쳐 광천 계곡 쪽으로 내려와서 열두 폭포의 맨 위쪽에 있는 시명폭포로부터 맨 아래쪽의 상생폭포를 차례로 둘러보고 보경사로 회귀하는 경로로 산행 코스를 잡았다.
어림잡아 20km 전후 거리의 만만찮은 산행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오랜만에 스스럼없는 친구들과의 함께하는 산행이고, 늦가을로 접어들 무렵인 지금쯤 한반도의 남부 이곳까지 단풍의 물결이 밀려왔을 터라 한껏 기대가 부푼다. 예고된 두어 차례의 가을비가 산행의 피로도와 흥취에 영향을 미칠 변수가 될 것이다.
일주문과 해탈문을 들어서니 보경사 좌측 가장자리 너른 공터에 몸을 비틀며 용솟음치듯 하늘로 치솟은 노송들이 늘어서서 산객을 맞이한다. 보경사 경내는 산행 후 회귀하면서 둘러보기로 하고 해우소에서 몸을 가벼이 비우고 문수암 쪽 능선으로 향하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사시사철 풍부한 수량을 자랑한다던 길 좌측 광천 계곡은 듣던 것과는 달리 너른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조금 더 발길을 옮기니 계곡을 가로막은 보가 보이고, 그 위쪽의 계곡에서 물소리가 들려 실망감이 이내 사그라들었다. 보경사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반듯한 포장길 밑으로 계곡을 가로막은 보에서 끌어온 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크고 작은 돌을 쌓아서 세운 각양각색의 돌탑들이 연이어 서있는 계곡은 층층 작은 폭포들을 내놓으며 열두 폭포에 대한 기대감을 키운다. 맑고 투명한 계곡 물과 청정한 물소리에 눈과 마음을 빼앗기며 스마트폰 셔터를 연신 누르다 보니 동행은 저만치 앞서 간다.
계곡을 뒤로하고 문수암이 자리한 능선 쪽으로 길을 잡았다. 잠깐의 동행 후 이별이 아쉬운지 계곡의 청량한 물소리가 멀리까지 산객을 따라온다. 인생에서의 만남도 잠시잠깐 스쳐가기도 하고 때론 오래도록 관계를 이어가게 하거나 평생의 연을 맺게 하기도 한다.
문수암으로 오르는 비탈길은 제법 가팔라 옷소매는 이마의 땀을 훔치기에 바쁜데 단풍으로 물든 능선들이 계곡으로 첩첩 내려앉는 풍경은 내 마음을 빼앗아 가려한다. 계곡 건너편 여러 능선 가운데 앞쪽으로 도드라져 나온 능선마루 암벽 위에 자리한 선일대가 눈에 쏙 들어온다. 그 아래쪽에는 겸재가 진경산수 기법으로 화폭에 담아낸 연산, 관음, 무풍 세 폭포가 차례로 자리하고 있을 것인데, 정작 눈에는 그 아래쪽의 상생폭포만 살짝 드러나 보인다.
홀연 나타나는 표지판이 가리키는 문수봉 중턱 문수암 쪽으로 올라서니 쪽문처럼 낮은 출입문이 보인다.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낮은 문으로 들어섰다. '대웅전' 현판이 걸린 나지막한 문수암 앞마당에서 건너편과 멀리 동해바다 쪽으로 굽이쳐 흘러내리는 산군을 한동안 조망했다. 멀리 여러 능선들은 겹겹 파도가 밀려드는 수면 위에 노을빛이 내려앉은 해면처럼 원색으로 물든 단풍과 푸른빛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가을빛의 향연을 펼쳐 보이고 있다.
문수암을 뒤로하고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으며 문수봉 언저리 능선으로 올라섰다. 산길 옆 키 높이의 싸리나무 군락은 고흐가 캔버스에 즐겨 사용했던 원색 물감처럼 샛노란 단풍을 토해 놓았다. 평탄한 능선은 기개 있고 지조 높은 선비를 닮은 참나무와 노송 군락을 번갈아 내놓으며 숭숭한 줄기 사이로 부는 선선한 바람이 땀을 식혀 준다.
발밑에 낙엽 밟히는 소리와 귓전을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발길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보경사에서 2km 여 거리의 해발 628미터 문수봉 정상에 다다랐다. 문수봉 정상 표지석에서 인증 숏을 남기고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각자의 배낭을 열어 목을 축이고 귤 등으로 쓴 입을 달랬다.
임도처럼 너르고 평탄한 능선길을 따라 2.5km 거리 삼지봉으로 향하는 길은 수리더미, 거무나리 등 계곡 쪽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내놓으며 고도를 조금씩 높여 간다.
발목까지 빠지는 참나무 낙엽길의 낙엽 냄새가 잊고 있던 기억 저장고 회로를 깨우며 어린 시절 시골에서의 추억을 더듬는다. 자갈길과 폭신한 흙길이 연이어 나타나며 삼지봉 정상으로 인도하는 길은 너무 빨리 지나가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드는 호젓한 길이다.
삼지봉 아래 등로 옆에 사각 목재 비목 하나가 서 있는데, 비목에 써진 글로 보아 어느 해 12.24일 포항의 모 고교생이 이쯤에서 조난을 당한 것이 아닌가 짐작케 한다. 인터넷에도 내연산 조난 관련 뉴스나 산행 후기가 적지 않게 검색되는 것으로 보아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각기 해발 711미터, 710미터로 높이가 다르게 표시된 표지석 둘이 서로 마주한 삼지봉에서도 인증숏을 남기고 향로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평탄한 단풍나무 터널 길을 지나고 뿌리에 박석을 움켜쥔 채 자신이 딛고서서 자란 박토 위에 모로 쓰러져 누운 아름드리 참나무 둥치 옆을 지났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낙엽이 깔린 길을 지날 때면 세상 모든 소리는 아득히 멀리 물러나 침잠하고 낙엽 밟히는 소리만 바스락대며 귓전에 울린다.
여태껏 산객도 한 두 명만 스쳐갔을 뿐으로 능선 코스를 찾는 이가 많지 않아 보인다. 하루에 고작 몇 천보씩 기록하던 만보계가 1만 4 천보를 가리키지만 가야 할 길은 지나온 길의 두 배쯤 될 터이다. 산행도 인생 여로와 같아서 서두르거나 조바심을 내다보면 산행의 즐거움은 고사하고 그 속에 함몰되어 골탕을 먹거나 실족을 하기 십상이다.
향로봉 능선으로 들어설 무렵 비구름이 온 산을 뒤덮어 시야가 닿는 주위가 바닷속에 잠길 듯 떠 있는 외로운 섬처럼 느껴진다. 내연산 최고봉인 해발 930미터 향로봉에는 일단의 산객이 둘러앉아서 산상 오찬을 들고 있다. 향로봉 바로 아래 계곡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자리한 작은 정자에서는 예닐곱 명이 음식을 차려 놓고 모여 앉아서 삼겹살까지 굽고 있다.
우리 일행은 정오쯤 향로봉에 못 미쳐서 자리한 정자에 걸터앉아 떡, 귤, 숭늉, 과자, 고구마 등 배낭에 챙겨 온 음식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었다. 키 높이의 향로봉 표지석에서 사진을 남기고 1.7km여 거리 시명리(時明里)로의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해발 930미터 향로봉에서 해발 400미터쯤의 시명리로 내려가는 길은 급전직하 내리막길이다. 향로봉은 계곡 쪽으로 수렴하며 내리 꽂히는 가파른 사면과 너덜길을 내놓으며 앙칼진 일면을 드러낸다. 낙엽이 산길을 융단처럼 덮고 있어 낙엽 아래 둥근 돌멩이라도 숨어 있다면 큰코다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조심 사뿐사뿐 발길을 내딛는다.
향로봉에서 출발한 지 약 한 시간 만에 해발 400미터쯤에 자리한 옛 화전민촌 시명리로 내려섰다. 시명리에는 돌로 쌓은 축대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이처럼 외진 오지에서 화전민들이 어떻게 생계를 이어갔을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낮은 능선으로 올라서니 열두 폭포를 알리는 이정표가 150여 미터쯤 아래쪽에 열두 폭포 중 계곡 맨 위쪽의 시명폭포가 자리한다고 알려준다. 발아래 크고 작은 돌들이 밟히는 가파른 길을 죽죽 미끄러지듯 내려가니 시명폭포가 바위틈 사이로 옹골찬 물줄기를 내리치고 있다. 시명리에서 보경사까지 이어지는 6km가 넘는 광천 계곡을 따라 시명폭포를 비롯한 내연산 열 두 폭포가 차례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급경사를 올라 산허리춤으로 난 길로 되돌아와서 다른 쪽 계곡의 상류 300미터쯤에 자리한 두 번째 폭포인 실폭포 쪽으로 향했다. 나무 데크를 따라 가파른 계단길을 두어 개 올라가니 높은 절벽 위에서 은빛 비단실처럼 가는 물줄기를 암벽의 움푹한 골을 따라 두어 번 꺾이며 아래로 길게 떨어뜨린 실폭포가 근사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대부분의 유람객들은 보경사에서 계곡을 따라 차례로 자리한 상생, 보현, 삼보, 잠룡, 무풍, 관음, 연산 등 일곱 폭포까지 오르고, 그 위쪽의 거친 계곡길을 지나야 마주할 수 있는 은폭, 복호 1폭과 2폭, 실폭, 시명폭 등 나머지 다섯 폭포는 생략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듯 보인다.
다시 계곡 하류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복호 2 폭포, 복호 1 폭포를 계곡 위쪽 멀찍이 설치해 놓은 전망대에서 조망했다. 호랑이가 곧잘 출몰하여 폭포 주위 바위 위에서 쉬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답게 복호 2 폭포는 우렁찬 소리를 내며 내리치는 은빛 굵은 물줄기가 기품 있고 당당해 보인다. 4-50미터 굽이돌며 물줄기를 새하얗게 부수고 있는 복호 1 폭포는 흰 배를 드러내고 길게 드러누운 호랑이를 연상케 한다.
어느새 굵어진 빗줄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또 다른 폭포처럼 떨어져 접었던 우산을 펴 들었다. 은폭포(隱瀑布)는 용이 숨어서 산다는 '숨은 용치'라는 별칭처럼 등로 아래 멀찍이 암벽 사이에 숨은 듯 자리하고 있다. 폭포 아래 가운데 돌출한 바위에 부딪혀 펼쳐지는 물줄기가 은빛 치마폭처럼 눈부시다.
선일대(仙逸臺)로 난 높고 가파른 나무데크 계단 위쪽으로 모습을 감춘 동행을 쫓아 무거워진 발을 한 발짝씩 옮겼다. 계단을 다 오르자 암벽 가장자리에 팔각정 선일대가 계곡 건너편 절벽 위 소금강전망대와 마주하고 서서 천길 아래 관음폭 계곡을 굽어보고 있다. 우산을 접고 선일대 정자에 올라서서 암벽 아래 두 갈래 물줄기를 내리쏟는 관음폭포와 울긋불긋 화려하게 단풍으로 치장한 채 비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는 내연산 겹겹 능선의 수려한 풍치를 한동안 조망했다.
올랐던 계단을 되돌아 내려와서 관음폭포 앞으로 다가가니 폭포 뒤쪽 암벽에 뚫려 있는 세 개의 동굴 관음굴과 폭포 아래 비췻빛이 감도는 감로담(甘露潭)이 더욱 신비로워 보인다. 관음폭포 위쪽에 가로놓인 연산교를 건너니 암벽 뒤에 숨어있던 연산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머리 위쪽 절벽 위에서 쏟아지는 폭포수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관음폭포와 연산폭포 주위 암벽에는 경상관찰사와 주변의 군수, 현령과 중앙의 정승 등 조선 중 후기 수많은 유명인사의 이름을 새긴 각자(刻字)가 눈에 띈다. 옛길 답사가 이한성은 CNB 저널(2022.2.14일)에 기고한 내연삼용추 답사기에서 연산폭포 부근 암벽에 보일 듯 말 듯 새겨놓은 “鄭敾 甲寅秋”라는 작은 각자를 확인했다고 한다. 청하현 현감으로 재직하던 때(1733.6월-1735.5월)인 1734년 가을에 겸재가 이곳을 다녀갔던 것이다.
그는 내연산의 여러 폭포들을 직접 둘러보고 그중 가장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무풍, 관음, 연산 세 폭포를 진경산수 기법의 <내연삼룡추도內延三龍湫圖> 두 점에 담아냈을 것이다. 관음폭포 위쪽에 암벽 뒤에 가려져 있는 연산폭포 등 세 폭포는 실제로는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한눈에 모두 다 들어오지 않지만, 겸재는 공간적 시각적 단절 분리된 대상을 하나의 화폭에 담아내는 과단성과 유연함을 곁들인 한 차원 더 높은 진경산수화를 창조해 낸 천재성을 발휘하고 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았음인지 힘찬 물줄기를 내리쏟는 겸재의 그림 속 모습과는 달리 연산, 관음, 무풍 세 폭포의 물줄기는 세찬 기세가 많이 누그러져 보인다. 연산폭포 가장자리 바위에 서서 물줄기 건너편 암벽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겸재가 남겼다는 그 각자는 좀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관음폭포와 무풍폭포 아래쪽에 차례로 자리한 잠룡, 삼보, 보현 폭포를 멀찍이서 조망했다. 보현폭포 부근 탐방길 위쪽에 자리한 소담한 보현암에는 아미타불과 관음불 등 삼존불이 자리하고 영험하다는 갓부처도 자리하고 있어 탐방객의 발길을 끌고 있다.
예부터 '쌍둥이 폭포'란 의미의 쌍폭으로도 불렸다는 맨 아래쪽 상생폭포를 끝으로 내연산 열 두 폭포를 모두 둘러보았다. 포항 지역 문학회 '형산수필문학' 동인으로 오래전 보경사와 청하골을 둘러보며 흐르는 물에서 유전하는 인생의 이치를 관조한 성홍근 수필가의 글이 하루종일 분주히 옮겼던 발길을 돌아보게 한다.
"무심하게 흐르는 물이 바위틈을 돌면서 크고 작게 떨어지기를 열두 번이니 마침내 생로병사에 이르럼을 깨우치면 그만이지 그 붙인 이름을 낱낱이 외우는 것은 차라리 멋쩍다."
_성홍근의 <보경사 단상>(兄山隨筆 제9호 1993)
계곡 옆으로 난 탐방로를 따라 내려와서 보경사 경내로 들어섰다. 신라 진평왕 때 창건했다는 천년 고찰 보경사는 가을비에 젖어 이슬 맞은 국화꽃처럼 깊은 생각에 침잠해 있는 듯 차분해 보인다. 대적광전, 대웅전, 영산전, 팔상전 등 당우들을 둘러보고 동행을 쫓아 발길을 재촉한다.
아홉 시간에 이르는 20km여 긴 우중 산행에 온몸은 땀과 비에 젖었고 다리는 천근만근 무겁지만, 해탈문과 일주문을 나서는 마음속에는 내연산 북변 주요 봉우리들과 열 두 폭포를 모두 둘러보았다는 뿌듯함이 만추의 단풍처럼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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