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장산, 세 정맥 한 곳에 모이다
칠장산이 있는 죽산으로 향했다. 짙은 안개가 사방을 덮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피해와 공포가 전국을 삼킬 태세다. 국내나 중국 일본 등 이웃뿐 아니라 세계 전역으로 확산일로다. 일죽 IC로 내려섰다. 칠장사를 비롯해서 봉업사지, 죽주산성, 매산리 석불입상 등 오래된 문화유산이 많이 전하는 죽산은 '경기도의 경주'로 불린다고 한다.
죽주산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친 방호별감 송문주 장군 동상이 맞이하는 죽산면 소재지로 들어섰다. 인력사무소 앞에 건장한 젊은 남성 네댓 명이 서성인다. 모습이 모두 동남아인들로 보인다. 죽산 시외버스터미널 정차장은 텅 비었다. 간간이 동서울 광혜원 이천 등지에서 달려온 버스가 들어와서 승객 한 두 명을 내려주거나 태우고 서둘러 빠져나간다.
구름 사이로 겨우 얼굴을 내민 태양은 달처럼 희미하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시리다. 버스로 도착한 친구를 태우고 산행 들머리 칠장사로 향한다. 이십 여분 만에 칠장사에 도착했다. 너른 마당 같은 주차장 위로 몇몇 산봉우리를 병풍처럼 뒤로하고 산비탈 높이 칠장사의 전각들이 들어서 있다.
들머리를 어디로 정할지 고민하다가 오른편 제비월산 쪽으로 오른다. 적갈색 참나무 잎사귀로 뒤덮인 산길은 안개에 싸여 아침인지 저녁인지 때를 가늠할 수 없다.
이름이 예쁜 해발 294미터 제비월산 정상에서 오백 여 미터 십여 분을 걸어서 신경준(1712~1781)이 산경표에서 분수(分水) 산맥을 기준으로 나눈 1 대간(大幹), 1 정간(正幹), 13 정맥(正脈) 가운데 하나인 '한남금북정맥' 능선에 닿았다.
이 정맥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속리산에서 갈라져 나와 한강과 금강의 분수 산맥을 이루며 이곳 칠장산까지 달려와서, 서북쪽 김포 문수산에서 뻗어온 한남정맥, 서남쪽 태안반도 안흥에서 뻗어온 금북정맥과 한 곳에서 만난다.
한남금북정맥을 따라 동서로 뻗은 능선을 걷는다. 곳곳에 노송들이 꺾이고 부러져 드러누워 있다. 오르내리는 능선이 이어지고 작은 봉우리들은 허리로 우회하는 옆길을 살짝 내어준다.
능선 오른편 참나무 가지 사이로 잔디가 누렇게 말라서 모래밭처럼 누워있는 골프장이 보인다. 칠장사를 둘러싼 제비월산, 칠장산, 칠현산 능선 사이를 골프장 네 개가 비집고 들어서 있다. 국내 골프장 수가 4백 수십 여 개에 달한다는 자료를 본 기억이 있다.
가히 음주가무뿐 아니라 놀이를 좋아하는 한국인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적 인간)로 정의해도 별 이의를 달지 못할 듯싶다. 그러고 보니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 떠도는 인간)에 가까운 나는 별종인 셈이다.
능선이 주춤 낮아지며 인목왕후, 채재공 등 옛사람들이 칠장사로 드나들던 고개로 갈지(之) 자처럼 구불구불 열 두 굽이라는 '바사리 열두 고개' 마루를 지난다. 고개는 고통스러운 길목이자 희망의 길목이다. 삶의 고통과 희망을 노래하는 민요 아리랑은 수많은 고개를 넘고 넘는다. 인목대비와 채재공은 어떤 아리랑을 부르며 이 고개를 넘었을까?
어떤 노송은 스스로 풍장을 하는 듯 껍질이 벗겨져 나간채 공중에 서있고, 덩치 큰 쓰러진 나무는 썩어서 문드러지고 있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저 나무들처럼 생명이 다 하면 죽고 썩는다. 죽어서 썩는 나무처럼 사람도 죽으면 육체는 썩거나 타서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영과 혼은 어디로 갈까? 옆에서 교회 다니는 친구의 신실치 못하다는 핀잔 소리가 들린다.
칠장산 못 미쳐서 세 정맥의 분기점이 나온다. 이처럼 대간이나 정맥들이 한 곳으로 만나고 나뉘는 곳이 몇 곳이나 될까? 비록 고도가 높거나 별다른 조망이 없지만 감회가 남다르다.
가끔 이름만 들어도 마음 설레는 것이 있다. 삼도봉과 민주지산도 그랬다. 젊은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 산, 충청 경상 전라 세 도가 서로 경계를 나누며 한 곳에서 만나는 곳, '삼도 대화합 기념탑'을 만날 날을 아직도 고대하고 있다. 분기점 이정표 주변을 한참 서성이다가 발길을 옮긴다.
한남정맥 줄기로 들어서서 지척인 너른 잔디밭에 작은 표지석이 놓인 해발 492미터 칠장산 정상으로 올랐다. 산객은 코빼기도 뵈지 않고 바람 소리만 성성할 뿐 사방으로 조망도 없다.
안개는 더욱 짙어졌고 바람은 매서운 소리를 지르며 능선을 넘는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쪽 능선 사면엔 잔설이 듬성듬성 남아있다. 질척이는 급경사 길을 나무 가지와 줄기를 붙잡고 내려선다.
해발 457미터 관해봉 언저리에서 노루 한 마리가 산객 발소리에 놀라 급히 뛰어서 달아난다. 뒤돌아보니 지나온 칠장산 봉우리가 저 멀리 안갯속에 흐릿하게 서있다. 높지 않은 봉우리들은 조금만 걸어도 멀어지고 다가서면 어느새 지척이다. 사람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관해봉에서 칠장산 정상으로 돌아오니 산객 두 분이 반대쪽에서 막 올라서고 해는 구름을 헤치고 나오며 기운을 펼친다.
"어수선한데 산행 오셨네요"
"네에~ 그저..."
두어 마디 주고받고 세 정맥 분기점 아래로 우회하여 금북정맥으로 들어섰다.
웅웅대며 휘몰아치는 바람에 밑동은 꿈쩍 않고 잔가지만 무질서한 듯 자유롭게 춤추는 참나무 숲, 뒹굴며 부스럭대는 낙엽, 코러스 하듯 서걱대며 일사불란하게 율동하는 산죽, 자연의 합창이 경이롭다. 바람은 긴 능선을 걷는 내내 몰아치며 모자챙을 들썩이게 한다.
칠장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에 박문수(1691~1756)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가 적힌 안내판이 서있다. 세 번째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그가 모친 간청대로 나한전에서 기도 후 꿈에서 부처님이 시제를 알려주어 진사과에 장원급제했다는 설명이다.
칠장산과 칠현산의 중간쯤 안부의 연유를 알 수 없는 '칠순 비 부부탑'을 지나고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한참 치고 올라 기왓장 파편이 군데군데 널려있는 언저리를 지나면 해발 516미터 칠현산 정상이 모습을 보여준다.
돌무덤 중간에 반듯하게 놓인 표지석에 눈도장을 찍고 정오가 조금 지나 칠장리 마을로 내려간다. 어느새 하늘은 구름이 걷혀 파란 모습을 드러냈다. 산 중턱 촌가 마당에서 백구 한 마리가 짖어대고 다른 한 마리는 산객을 안내하듯 아랫마을로 난 아스팔트 길을 멀찍이 앞서간다.
길 양옆으로 서있는 14기의 부도군, 당간과 지주, 칠장사 사적비를 둘러봤다. 마을에서 칠장사로 오르는 아스팔트 길 양쪽 산기슭을 온통 산죽이 덮고 있다. 죽산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걸까?
칠장사를 둘러선 능선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칠현산 칠장사' 현판이 달린 일주문으로 들어섰다. 산행 말미 이름난 고찰을 찬찬히 둘러보는 기회는 많지가 않다. 남몰래 감춰둔 보물을 꺼내 보는 느낌이다.
누군가가 소조 사천왕상에게 공양한 과자봉지가 놓인 사천왕문을 들어섰다. 그 우측 범종각의 범종 목어 운판이 아름답다. 대웅전 처마의 풍경은 그 옆 원통전 풍경과 앞 다투듯 바람에 호들갑스럽게 운다.
제중루 극락전 봉업사지석불 대웅전 원통전 나한전 혜소국사비 삼성각 등 비탈을 따라 층층이 들어선 당우들을 둘러본다. 혜소국사가 우물을 찾아온 도적 7인을 교화하여 깨닫게 했다는 설화의 그 우물, 건강 합격 승진 등을 기원하는 리본으로 난간이 뒤덮인 박문수 다리, 그리고 명부전도 차례로 둘러보았다.
대개 당우 외벽은 싯달타의 일생을 묘사한 벽화가 채우고 있지만, 이곳 명부전 외벽은 독특하게 혜소국사와 일곱 도적, 활을 쏘는 궁예, 힘겨루기 하는 임꺽정 등 칠장사에 얽힌 여러 얘기들을 담은 그림들이 채우고 있다.
극락전에는 갖바치 출신 스승 병해 대사를 찾아 이곳을 드나들던 임꺽정(?~1562)이 입적한 스승을 위해 조성했다는 '꺽정불'이 남아 있고,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는 한때 이곳에 머물며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를 남겼다니 흥미롭다.
선비, 도적, 농민반란 수괴, 왕후 등 곤궁에 처해 의탁하러 온 중생들의 지위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 가지로 보듬고 품어준 깊고 넓은 자비로움이 이 절을 명찰로 이름나게 하지 않았을까.
극락전을 둘러볼 때가 마침 점심 때라 "공양 한 그릇 하고 가세요."라고 권하던 보살님에게서도 이 사찰의 넓고 깊은 포용과 자비의 전통을 읽을 수 있다. 칠장산과 칠장사에서 두루 배울 점이 많아 보인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 간절한 것들, 포용 화합 베풂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