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봉산, 강과 산의 향연
평소 언젠가는 한 번 가야겠다고 벼르던 산 가운데 하나가 팔봉산이었다. 군 복무 시절 원주와 춘천을 오갈 때 지나치던 홍천처럼, 그 주변을 지날 때마다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던 산이었다.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갈망이 어디 산뿐이랴! 비우던 버리던 감행하지 않으면 그 마음은 결코 가벼워질 수가 없나 보다.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라는 노랫말처럼. 그래서인지 모 산악회가 준비한 팔봉산 산행 계획이 반가웠다.
구리에서 출발하여 사당을 거쳐 복정에서 나머지 산객을 태운 버스는 빈 좌석 없이 만원이다. 1호차에 올라 친구와 반갑게 악수했다. 신청자가 많아서인지 버스 한 대를 증차해서 1,2호 차가 나란히 목적지로 출발했다.
경기와 강원의 경계를 지날 즈음 자욱이 끼었던 아침 안개는 팔봉산이 가까워지자 말끔히 사라지고 솜사탕 구름이 피어오른 하늘은 쾌청하다.
팔봉산 입구에 정차한 버스에서 내린 산객들은 저마다 산행 채비에 분주하고 삼삼오오 매표소를 지나 제1봉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곳엔 입장료가 있고 산행 방향도 제1봉에서 제8봉 쪽으로 일방통행이라는 직원의 얘기다.
강가에 웅크리고 앉은 여덟 개 봉을 가진 거대한 낙타의 등으로 올라가듯 또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트를 타러 들어가듯 기분이 묘하다. 촉촉이 젖은 나뭇잎이 능선 너머에서 이마 위로 들이치는 아침햇살에 반짝인다.
지그재그로 난 경사로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면서 암릉이 시작되고 제1봉에 닿는다. 산 밑에서 보던 것과 달리 봉과 봉 사이 골은 제법 깊어 오르내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제2봉으로 오르는 암벽 능선부터 제대로 조망이 트이기 시작했다.
마치 바위와 일체인 듯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선 소나무는 지금껏 험한 비바람을 견디며 저리 높이 자랐을 것이다. 잦은 등산사고의 원인으로 여겨지던 산의 강한 음기를 다스리고자 입구에 남근목을 세웠다는 얘기도 있지만, 온통 바위로 덮인 봉우리를 오르며 겨울에 산행 통제를 하는 이유를 알겠다.
제2봉에는 칠성당과 삼 부인당이 자리하고 있다. 모녀와 며느리, 세 부인 신을 모시는 삼 부인당에서는 조선 선조 때부터 마을의 평온과 풍년을 빌고 액운을 막는 당굿을 매년 음력 3,9월에 올린단다. 칠성, 산신, 삼부인신을 모시는 세 마당의 팔봉산 당산제는 지금까지 전통을 이어오는 국내 유일의 부락제라고 한다.
강릉에서 기도하러 왔다는 여인 셋 중 둘은 좁은 당집 안에서 눈을 붙이고 있다. 산객들의 발소리에도 꼼짝을 않는 것을 보니 이른 새벽 치성에 기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중 한 분은 호기심에 끌려 이러저러 질문을 던지는 내게 호두과자 한 움큼을 내민다.
건너다 보이는 제3봉과 그 아래에서 굽이치는 홍천강이 가히 장관이다. 봉과 봉 사이 골 부분은 그늘이 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땀을 식혀준다. 제2봉에서 내려서자마자 제3봉으로 좁은 바위틈으로 높게 난 철계단을 오른다.
제3봉 정상 표지석은 멀찍이 물러선 산군 앞으로 펼쳐진 마을과 너른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다. 제4봉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로 그중 하나가 사방이 암벽으로 된 좁은 틈새로 올라가는 길로 '해산 굴'이라 불린다. 몸을 뒤틀고 발버둥을 치며 좁은 바위 틈새를 지나 땅 속에서 하늘로 치솟듯 오르는 힘겨움을 해산에 빗대어 이름 붙인 그 코스는 스릴과 재미와 웃음을 준다.
봉우리 하나하나를 지날 때마다 돌아봐도 앞을 봐도 장관이고 한 폭의 그림이다. 한 뼘 크기의 삼각형 모양 제5봉 정상석이 앙증맞다. 멀리 제1봉 아래쪽에 홍천강 위를 가로지른 팔봉교가 모습을 보인다.
제6봉 바로 아래 껍질을 모두 벗어던진 채 푸른 하늘을 등지고 선 소나무 고사목 한 그루는 지나는 흰 구름을 잎사귀 삼은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정오가 되려면 아직도 30여 분이 남았지만 산행은 어느덧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안부 너머로 제7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능선 너른 바위에 걸터앉아 그림 같은 하늘과 구름을 보며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허기를 달랬다.
어른 키 높이의 돌탑이 서있는 6봉과 7봉 사이 안부는 천연 에어컨처럼 시원한 바람골이다. 산객들이 노송 군락과 바위들이 어우러진 안부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앉아 땀을 식히거나 배낭을 열어 음식을 든다.
제7봉으로 오르는 능선은 잔뜩 성난 공룡의 등 비늘처럼 날이 선 암릉이다. 유난히 고사한 소나무가 많은 제7봉에서는 연이어 뒤따르던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인증 숏을 찍기에 분주하다. 바위를 타고 내려와서 틈새로 파고든 소나무 뿌리를 보며 그 강인한 생명력에 혀를 내두른다.
제8봉 쪽을 휘돌아 능선 좌측으로 휘도는 홍천강, 멀리 무릎 높이 강물 속에 서있는 사람들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물놀이 겸 다슬기를 잡으려는 것일 터이다.
사이좋은 형제처럼 서로 가까이 이웃하며 솟아 있는 1~7봉과는 달리 제8봉은 홀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7봉과 8봉 사이 안부에는 출렁다리도 하나 놓여있어 깊게 파인 골을 지나는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한껏 운치도 더해준다.
안내판의 '제일 위험한 구간'이란 경구처럼, 제8봉으로 가는 바윗길 계단은 가파르고 군데군데 바위에 박힌 철심 발판과 손잡이를 디디고 잡으며 올라야 한다.
소나무와 바위돌이 어우러진 제8봉은 제법 너르다. 산객들은 여기저기 소나무 그늘 아래 바위마다 모여 앉아 좀체 마지막 봉우리에서 내려갈 생각이 없다. 필시 짧은 산행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 것이다.
제8봉을 뒤로하고 내려가는 길, 발아래 흐르는 홍천강을 내려다보며 절벽에 박힌 철심을 디디며 철봉 난간을 붙잡고 한발 한발 내딛는 급전직하 아찔한 길이다.
끝날 줄 모르게 이어지던 가파른 암벽 길은 홍천강 가로 내려서며 멎는다. 홍천강은 서석면 생곡리에서 발원하여 군 중앙부를 동서로 가로지른 후 한강으로 안겨들기 전 이곳에서 팔봉산과 한바탕 어우러지며 또 다른 절경을 펼쳐놓는다.
강물 위에 내려앉는 햇빛이 잔물결에 부서지며 반짝인다. 강가 수초 위로 물잠자리들이 날았다 내려앉고 소금쟁이는 한가로이 헤엄친다. 검은물잠자리, 소금쟁이, 물비늘,... 이런 풍경이 잊고 있던 옛 기억을 되살려낸다.
산행을 마친 산객 몇몇은 신발을 벗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얕은 곳을 택해 강을 건넌다. 산과 강,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유희하듯 어우러진 강가, 절벽 밑으로 난 난간을 따라 물 흐르는 소리 물놀이하는 소리 매미소리에 귀와 눈과 온몸을 내 맡기고 물 흐르듯 걷는다. 산에서는 보이지 않던 들꽃들이 강 가장자리 여기저기서 활짝 웃는 얼굴로 자꾸 발걸음을 붙잡는다.
힌두교에서 하천을 이르는 말이자 갠지스 강을 신격화한 말 '강가(Ganga)'처럼, 홍천강과 팔봉산이 어우러진 '강가'의 날 좋은 한때는 신이 내려준 선물 같다.
뭉게구름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숨겨 두었던 아름다움을 하나 둘 드러내며 뽐내는 팔봉산이 여덟 폭 동양화라면, 물비늘이 반짝이는 맑고 투명한 홍천강에서 물놀이 낚시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유려한 수채화다.
팔봉산 들머리이자 날머리인 안내소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땀이 흥건해진 셔츠를 갈아입었다. 수려한 명소들이 많아 팔경으로도 모자랐는지, 하나를 더 보탠 '홍천 구경' 사진이 화장실 벽면을 채우고 있다.
가리산, 미약골, 금학산, 가령폭포, 수타사, 용소계곡, 살둔계곡, 삼봉약수와 더불어 구경의 하나, 그것도 제1경인 팔봉산에 흠뻑 빠졌다가 나왔으니 짧은 산행이 아쉽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홍천교를 건너 유원지 주차장으로 난 길을 걸으며 강 건너에 거대한 수석처럼 앉아 있는 팔봉산을 제1봉부터 제8봉 쪽으로 찬찬히 다시 감상해 본다.
짙푸른 팔봉산 위로 파란 하늘을 하얀 뭉게구름이 수놓은 풍경은 그 어떤 인상파 화가의 그림보다 더 인상적이다. 느릿한 여유 속에서 독특한 매력을 맛본 특별한 산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