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 산 기행

설악산 암자와 불심

인산(仁山) 2024. 10. 12. 15:49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때 이르게 달아오른 바깥공기의 열기가 훅 하고 목덜미를 비집고 들어온다. 전철역은 늦은 퇴근 귀가 인파로 북적이고 역 광장은 열기에 아랑곳없이 젊은 남녀들의 열정으로 넘친다.

늦은 시각 서울 잠실과 성남의 경계에 위치한 복정역은 원거리 야간산행객을 태울 버스가 거쳐가는 거점 중 한 곳이다. 등산복 차림 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신들이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린다. 자정 경에 도착한 45인승 버스는 친구 둘을 포함해서 산객들로 빈 좌석 없이 가득 찼다.

버스는 소등을 하고 도심을 벗어나 어둠 속을 달려 설악으로 향한다. 사람들은 짧은 잠을 청하는데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몸만 이리저리 뒤틀어 본다. 새로 1:30경 내설악 휴게소에 정차한 차에서 내려 신선한 공기를 쐬고 굳어 있는 팔다리도 펴본다.

휴게소 불빛만 희미하고 사방이 캄캄한 밤 기대했던 초롱초롱한 별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날이 흐려 별들은 구름에 묻혔고 구름 또한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는 것일 터이다. 휴게소를 나선 버스가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려 한계령에 탑승자 일부를 내려주고 나머지는 오색에서 내려놓았다.


오색은 먼저 도착해서 산행 출발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예정시간보다 10여 분 이른 02:50경 등산로 입구가 열렸다. 산객들은 저마다 이마에 쓴 랜턴을 켜고 마라톤 출발점을 뛰쳐나가듯 어둠 속 보이지 않는 등산로 입구로 몰려들어 앞사람의 꽁무니를 쫓는다. 우리 일행은 오색을 출발해서 대청봉, 봉정암, 오세암, 영시암을 거쳐 백담사로 내려서는 코스로 산행 코스를 잡았다.

오색약수에서 대청봉으로 난 5km 가파른 오르막 길은 사방이 어둠에 묻혀 있다. 버스에서 산행대장이 산객들에게 빠르면 두 시간 통상 세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하던 그 길을 아무 말 없이 한 발 두 발 옮긴다.

달빛도 없는 야간산행의 초입 대청으로 가는 길은 앞에 놓인 미지의 길을 '죽어나 사나' 무작정 걸었던 사회 초년병 시절의 그 길처럼 '밝은 내일'을 고대하면서 고통스럽지만 인내하며 걷는다.

오색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는 가파르고 긴 계단길

오색과 대청봉 중간쯤에 있는 설악폭포 부근 어둠 속 계곡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이내 다시 멀어졌다. 이른 새벽어둠에 묻혀 있던 하늘이 높은 능선과 숲 사이로 손바닥 만한 모습을 드러낸다. 일출 전 이른 시간이지만 왼편으로는 끝청과 중청의 모습도 온전히 들어온다.

시간 여유가 있는 코스를 선택한 우리는 마음이 느긋하다. 많은 산객들에게 길을 비켜주며 오르다 보니 빠르면 두 시간이라던 대청봉을 세 시간만인 오전 6시가 훌쩍 넘어 도착했다.

온통 바위로 덮인 대청봉엔 먼저 오른 산객들로 북적이고 정상 표지석 주변엔 인증숏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섰다. 관모봉과 화채봉, 대청과 어깨를 나란히 한 중청, 또렷이 웅자를 드러낸 서북능선 공룡능선 용아장성, 구름에 잠긴 천불동 계곡... 대청이 사방으로 장관을 펼쳐 놓았다.


대청에서 중청과 소청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처럼 평탄 길이 허리 높이 관목과 다채로운 들꽃 사이로 놓여 있다. 중청 대피소 마루턱에 걸쳐 앉아 배낭을 열고 단무지 생강 시금치 계란 등과 함께 정성을 듬뿍 들여 챙겨 온 친구의 김밥 등으로 아침을 들었다.

거대한 축구공 모양의 군 통신시설 두 개가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청봉의 오른쪽 허리로 난 길을 휘돌아 넓게 놓인 계단 길을 따라 소청으로 내려간다. 좌우로 운해로 덮인 계곡과 늘어선 능선들의 웅장한 모습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지 싶다.

대청봉에서 중청봉으로 가는 능선길
거대한 암봉 네댓 개 아래 독수리 둥지처럼 아늑히 자리한 봉정암

소청에서 봉정암을 거쳐 오세암으로 가는 산길은 이번 산행의 백미다. 벼루고 벼르던 봉정암과 오세암 그리고 덤으로 영시암을 차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측으로 공룡능선 좌측으로 용아장성이 서로 자웅을 겨루듯 모습을 보였다 감추었다 하며 장관을 펼친다. 두 능선이 빼어난 자태를 뽐내지만 온갖 불화와 알력으로 밀고 당기며 이전투구하는 인간세상과는 달리 서로를 인정하고 조화하며 용인하는 너그러움이 있다.

소청에서 뻗어 내린 능선이 거대한 암봉 네댓 개를 우뚝 세우며 멈추어 선 곳, 그 아래 독수리 둥지처럼 봉정암이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저번 서북능선을 타면서 용아장성 너머로 소청봉 아래 안겨있던 봉정암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었다.

백담사의 부속 암자로 대표적 불교 성지인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 봉정암은 643년 선덕여왕 때 자장이 당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이곳에 봉안하고 창건했단다. 677년에 원효, 1188년에 지눌이 각각 중건했단다. 법당과 요사채 그리고 법당 옆 바위 위에 보물 제1832호 봉정암 오층 석탑이 자리한다.


이른 아침이라 수행객 발길이 없는 봉정암은 산새 소리가 청아하고 먹이 찾는 다람쥐들만 분주하다. 벽기둥에 "세상 지혜는 버리고 들어오라(入此門來 莫存知解)"는 법문이 적힌 적멸보궁, 보살 한 분이 손걸레질이 바쁜 그곳 보좌에는 부처님이 보이지 않고 황금색 방석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보좌 뒤 투명한 큰 창문 너머 건너편 백 여미터 거리의 바위능선 위에 하늘로 오를 듯 날렵하게 솟아 있는 오층 석탑,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그 석탑이 창문 안으로 들어와 보좌에 앉았기 때문이다.

오층탑 앞에서 합장을 한 번하고 옆으로 비껴 오르는 바윗길 능선을 넘어 오세암으로 향하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과 계곡 오르막이 연이어 나오는 4km의 험난한 길이다. 나한봉이 펼친 암봉 아래 안겨있는 오세암이 바람에 실려온 목탁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봉정암을 지나 오세암 쪽으로 난 길

성불한 다섯 살 아이의 아름다운 전설을 가진 오세암은 오세암을 비롯하여 동자전 천진관음보전 시무외전 범종각 등이 들어선 웬만한 사찰의 규모를 가졌다. 마침 점심 때라 경내 나무의자에 걸터앉은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 사찰에서 보시하는 미역국에 밥을 넉넉히 말아 허기를 채우고 돌 동자승이 든 바가지로 흘러내리는 약수도 한 병 그득 담은 후 영시암으로 발길을 옮긴다.

봉정암에서 오세암과 영시암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유난히 템플스테이 등에 참여해서 불공을 드리러 오르는 불제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개 생계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났을 법한 나이로 공양물을 챙겨 등에 지고 험한 계곡과 가파른 고개를 마다하지 않고 봉정암이나 오세암으로 향했다.

많은 사찰이나 수도 암자가 험한 산중에 위치한 까닭도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를 인내하며 건너듯 험한 계곡과 가파른 고개를 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해탈에 닿을 수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체험하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오세암이나 봉정암의 갈림길에 위치한 영시암은 서로 다른 목적으로 모여든 남녀노소가 요사채 마루나 난간 등에 빼곡히 들어앉아 삼삼오오 얘기를 나누고 휴식을 하며 산세와 암자가 만들어낸 산수화 속 인물이 되었다. 영시암(永矢庵)은 서인이었던 부친 김수항이 기사환국으로 사사되자 1709년 숙종 35년에 이 절을 세우고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겠다는 김창흡의 맹세가 담긴 이름이라고 한다.


산객 유람객 불제자들로 붐비는 영시암을 뒤로하고 백담사로 향한다. 그 길 왼편으로 여러 계곡에서 한 데로 모여 가뭄에도 수량이 풍부해진 물이 백담계곡을 이루어 하산길을 따라 나란히 흐른다. 백담사는 목전이고 픽업 시간은 여유로워 계곡 물에 땀을 씻고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니 무겁게 쌓인 피로가 모두 달아난 듯 가쁜하다.

처음으로 보게 될 백담사가 가까워질수록 걸음은 가벼워지고 기대감은 점점 커지는데 한 두 줄기 희미하던 빗줄기가 둑 터진 저수지처럼 걷잡을 수 없는 굵은 소낙비로 변했다. 느긋하던 마음에 조급증이 일고 사람들은 저마다 우비를 꺼내 입기에 부산하다.

예견된 비 소식이 막상 큰 비가 되어 들이닥치니 설악휴게소 매점에서 동이 나버려 우비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곪은 상처처럼 아프다. 배낭에 방수덮개를 씌우고 겉옷으로 머리를 가리고 걸음을 재촉했지만 30여 분간 가문 땅에 분풀이하듯 쏟아붓는 소낙비를 감당할 재간이 없다.

영시암에서 백담사로 난 널찍한 길이 온통 빗물로 덮였고 흥건히 젖은 바지와 물이 들어찬 등산화는 느긋하던 마음속 여유를 오간데 없이 휩쓸어 갔다. 비를 만나 영시암에서 백담사 3.5km 구간이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백담사에 대한 기대감도 소낙비에 쓸려가 버리고 비에 쫓겨 도망치듯 백담사 아래쪽 버스터미널로 직행했다.


"마음에 여유나 관심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는 대학 구절은 탁월한 통찰이다. 뒤에 쳐져있던 친구는 봉정암 윤장대(輪藏臺)를 돌리며 '나무아미타불'을 외던 자비로운 마음이 넘쳤는지 소낙비에 놀란 보살 한 분에게 우산을 씌워 백담사까지 데려다주었더란다.

용대리에서 올라온 버스는 가득 찬 승객을 내려주고 다시 가득 승객을 채우고 구불구불 내리막길을 달려 용대리로 향한다. 산행의 끝은 비와 피곤에 젖고 힘겨웄지만 오랜 가뭄에 굵은 소낙비가 싫지 않고, 소낙비 때문에 둘러보지 못한 백담사를 다시 찾아올 이유가 생겼으니 오히려 다행한 일이다.

부디 이번 비로 메마른 전국 저수지에 백담사(百潭寺) 주위 계곡에 있다는 마르지 않는 백개의 연못 웅덩이처럼 물이 그득 차길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귀로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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