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그 청량함에 빠지다
어제 시작된 비가 그치지 않고 아침엔 보슬비로 바뀌었다. 청량산 부근은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양재역 버스 정류장 앞에서 마스크를 낀 산객들이 미어캣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산행 버스가 들어오길 기다린다.
고속도로를 달려 천등산 휴게소에서 잠시 숨을 돌린 버스가 풍기 IC로 내려섰다. 소백산맥 너머 다도해처럼 끝없이 펼쳐진 산군 사이로 지리하게 이어진 얽히고설킨 길은 낙동강이 운곡천을 끌어안는 명호면으로 인도한다.
태백 황지연못에서 발원해서 청량산 옆을 지나 안동호에서 세를 결집하여 남쪽 바다까지 천 삼백 리의 긴 여정을 이어갈 낙동강, 발원지에서 멀지 않은 상류는 폭이 넓지 않지만 물줄기 흐름은 경쾌하고 발랄하다.
불가의 산에서 유가의 산으로
산행 들머리는 명호면 면소재지에서 35번 청량로를 따라가다가 청량산과 축융봉 사이의 긴 계곡 옆 길 위에 앉아 있는 입석(立石) 부근이다. 안내도를 보며 입석-응진전-청량사-김생굴-자소봉-탁필봉-자운봉-장인봉-금강대-청량 지문 순서로 대강의 코스를 그려본다.
청량산 육육 봉 아는 이 나와 백구로다
백구야 어찌하겠냐만 못 믿을 게 도화로다
도화야 물 따라가지 마라 뱃사공 알까 하노라.
<淸凉山歌, 이황>
온통 넝쿨로 뒤덮인 입석 앞에 스스로 '청량산인'이라 칭했던 퇴계 이황의 시 한 편이 쓰인 목판이 서있다. 시에서 청량산에 대한 퇴계의 각별했던 애정과 은연한 자랑을 느낄 수 있다. 퇴계로 인해 청량산은 주자의 무이산처럼 '불가(佛家)의 산'에서 '유가(儒家)의 산'으로 바뀐 셈이다.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들머리에서 청량산 품 속으로 든다. 금탑봉은 장인봉을 필두로 좌에서 우로 줄 지어 솟아 있는 청량산 산군 앞쪽에 연화봉과 함께 첨병처럼 마주 보며 나앉아 있다. 위아래 천애 절벽인 금탑봉 허리로 난 길을 휘돌면 응진전, 어풍대, 총명수 약수터 등이 연이어 나타난다.
석가 삼존불과 16 나한이 봉안된 응진전은 청량사 부속 건물의 하나로 추정되는데, 노국대장공주 상이 함께 안치되어 있어 공민왕이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청량산으로 몽진했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청량산 맞은편 축융봉 기슭에는 공민왕 사당인 광감전(曠感展)이 있다고 한다. 응진전 뒤 절벽에 동풍석이 있고, 요사채 옆 절벽 사이에서 감로수도 흘러나온다고 한다.
준봉 선계(仙界)에 포근히 둘러싸인 산사
최치원이 그 물을 마시고서 더 총명해졌다는 암벽 아래 총명수 약수터에 고인 물은 탁해 보인다. 그 앞 벼랑 쪽에 청량사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이 어풍대(御風臺)다. 외청량과 내청량을 가르는 기점이라니 이곳을 지나면 청량의 속으로 더 깊숙이 드는 셈이다.
고도를 낮추며 눈 아래 보이는 청량사로 향했다. 괴암 준봉의 선계(仙界)에 포근히 둘러싸인 청량사 경내로 들어서니 산객 또한 선계로 들어온 듯 마음이 경건해진다. 응진전과 함께 663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청량사의 공민왕 친필 편액이 걸린 유리보전(琉璃寶殿), 지장전, 범종루, 봉정암 오층 석탑을 연상케 하는 오층 석탑 등을 수박 겉핥듯 둘러보고 쫓기듯 서둘러 어풍대로 되돌아 올라왔다. 초행이라 가늠하기 쉽지 않은 산행 시간을 주어진 시간에 맞추려니 조급증이 일었기 때문이다.
다시 어풍대로 올라서니 뻐꾸기가 울음소리가 두어 번 들린다. 금탑봉을 휘돌아 경일봉 허리로 접어드는 곳에 김생굴이 나온다. 왕희지를 뛰어넘는 명필로 송나라까지 이름이 났다는 ‘해동의 서성(書聖)’ 김생이 10년간 글씨 공부를 한 곳으로 전해진다. 비스듬히 패인 굴 위 절벽에서 굵은 비처럼 폭포수가 떨어지는 모습이 신비롭다.
산 허리춤을 따라가던 길이 자소봉을 향해 위로 치솟으며 몸을 땀범벅으로 만든다. 연신 이마를 훔치는 옷소매도 땀으로 흥건하다. 주능선 위에 도깨비 뿔처럼 우뚝 솟은 암봉 언저리 해발 840m 자소봉으로 긴 사다리처럼 놓인 계단을 올라섰다. 툭 트인 공간을 온통 연초록빛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전경이 수려하다.
계단을 내려와서 능선을 따라가면 기둥처럼 우뚝 솟은 탁필봉이 턱 하니 앞을 가로막는다. 봉우리 밑동 옆에 놓인 표지석을 스쳐 지나고 곧이어 모습을 보이는 해발 846.2m 연적봉에 올랐다. 자소봉과 탁필봉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형제처럼 솟아 있다. 비가 온 때문인지 봉우리들 사이 깊고 얕은 여러 골 가운데 간혹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린다.
신선처럼 산과 하나되어 초연히 걷는 산행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열댓 명의 산객 중 유독 노 산객 한 분과 산행 중 여러 번 마주쳤다. 배낭에 달린 붉은색 천에 '국토순례 백대큰섬 백대명산 백팔산사'라 적힌 노란색 글귀가 인상적이다.
"몇 살로 보이나요?"
"예 70쯤..."
연적봉에서 다시 만난 노 산객과 지리산 종주 산행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나이에 대해 주고받은 대화다.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리산 종주의 기억이 아련하다. 지리산의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을 별들의 세계에 다시 한번 빠져보고 싶다.
그 노 산객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예 700세쯤.."으로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 맨 뒤에서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이 지나는 코스 명소들을 꼼꼼히 눈여겨보며 카메라에 담는 모습이 신선처럼 초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산을 정복의 대상인양 단시간에 종주하는 산행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도 내 생각과 같았다.
자소봉에서 1.2km 지점 자란봉과 선학봉 사이에 이쪽저쪽 두 선계를 잇듯 90m 길이 '하늘다리'가 놓여 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높이 70m 다리 밑을 내려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총총걸음으로 건넜다. 해발 800m에 두 봉우리 사이에 걸린 다리는 가히 '하늘'다리라고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긴 철계단을 오르면 장인봉으로 가는 능선이 주홍 주단을 깔지는 않았지만 완만한 길을 내놓는 아량을 베푼다. 풍기 군수 주세붕이 중국 태산의 장악(丈岳)에 견주어 이름했다는 청량산 최고봉, 여러 봉우리 가운데 맨 끝에 가장 높이 우뚝 선 해발 870미터 장인봉은 이름처럼 큰 어른다운 풍모를 지녔다.
"저거 산에다 뭔 짓을 한 거야!"
산객들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내뱉는 말마따나 청량산 주변 산 곳곳 완만한 기슭이 피부가 깎이고 속살을 들어낸 채 태양광 흑판이 덮고 있는 모습이 볼썽사납다.
급하게 내리 뻗은 산기슭 아래로 낙동강이 보인다. 장인봉 아래 전망쉼터 데크에서는 장인봉과 그 측면 암벽이 고스란히 보인다. 밑동과 등뼈를 온전히 내보이는 암벽의 가파른 철계단 위로 뚝뚝 떨어지는 땀은 두려움 때문인지 쌓인 피로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명현고승들이 흠모한 진면목을 드러내다
지리한 급전직하 계단길이 다하고 금강대 절벽으로 난 길로 접어들면 할배할매송, 여여송, 삼부자송 등 저마다 풍모가 예사롭지 않은 소나무들과 퇴계의 제자 금난수, 승려 정안 등이 머물며 학문과 불도에 정진했다는 금강굴이 눈길을 잡는다.
청량산은 일월오봉도처럼 밑동부터 깎아지른 절벽이라 범접하기 어렵고 까다로워 보였다. 절벽에 기대어 수직으로 놓인 철계단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장인봉에서 금강대 쪽으로의 하산 길은 이런 생각이 흔들리지 못하게 '쾅'하며 못을 박는다.
그렇지만 겉모습과는 달리 일단 그 품 속으로 들면 감추어 놓았던 기기묘묘한 절경을 하나씩 꺼내 놓고 고고한 기품을 보이며 수많은 명현고승(名賢高僧)들조차 흠모할 수밖에 없었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실로 산이건 사람이건 그 무엇이건 겪어보지 않고는 그 진면목을 알 수 없겠구나 싶다. 다만 열 두 봉우리를 비롯 수많은 대(臺)와 굴(窟), 샘과 폭포 등을 세세히 둘러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청량지문(淸涼之門)을 뒤로하고 낙동강 위로 놓인 청량교를 지나 청량산박물관, 민박업소, 캠핑장 등이 모여 있는 주차장 옆 마트의 벤치에 앉았다. 오이채를 얹고 얼음을 띄운 잔치국수에 다래 양념장을 한 스푼 넣었다. 달달한 도시 음식에 오래 길들여진 혀가 무미한 듯 허기를 채워주던 유년의 기억을 되살려 낸다.
참마 생막걸리 한 병을 곁들였다. 술 못하는 친구를 대신해서 학소대(鶴巢臺) 앞 낙동강 물소리를 불러들여 한 잔 하니 산행의 피로는 온데간데없다. 흠뻑 땀 흘리며 어우러지던 청량산이 초행인데도 자못 오랜 친구처럼 정이 두터워진 느낌이다. 막걸리 한 잔에 취기처럼 흥취가 올라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