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당호반 둘레길
팔당호반, 수도권 지척의 청정구역
구월의 마지막 주말이다. 이른 아침 경기도 광주시 퇴촌남종면 통합보건지소로 차를 몰았다. 2022년 11월에 개통된 경기도 광주의 '팔당호반 둘레길'을 둘러볼 요량이다.아침 일곱 시가 조금 지나 보건소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보건소 뒤편 가건물처럼 보이는 곳에서 떠들썩한 소리 가 들려 들여다보니, 부근 주민들 20~30여 명이 네댓 개 코트에서 배드민턴 복식 경기를 하고 있다. 대부분 환갑이 넘어 보이는데, 활력이 넘치는 모습에서 토마토 산지로 이름난 이 지역 주민들의 바지런한 일면을 보는 듯하다.
팔당호반 둘레길은 1코스 팔당물안개공원~ 검천2리 종여울(7.3km), 2코스 종여울~ 팔당물안개공원(5.7km) 3코스 퇴촌남종보건소~ 팔당물안개공원(5.3km), 4코스 퇴촌남종보건소 ~망조교(5.7km) 등 총 4개 총 23㎞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코스를 둘러볼까 고심하다가, 보건소에서 물안개공원까지 이어지는 3코스를 완주하고, 물안개공원에서 금봉산과 4코스의 중간지점인 국사봉을 거쳐 보건소로 회귀하는 콜라보 코스로 결정했다.
둘레길 3코스는 보건소를 기점으로 '산수로(山水路)'를 따라가는데, 이 길은 그 이름처럼 좌측에 경안천 우측에 국사봉을 끼고 오리(梧里), 성황당 고개, 금사리, 망조고개, 분원리를 거쳐 귀여리(歸歟里)로 이어질 것이다. 보건소 길 건너편에 가을 체육대회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있고, 아침 공기는 신선하여 바야흐로 좋은 계절 가을이 왔음을 실감케 한다.
도로 옆 인도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길 좌우로 논밭과 화초를 내놓은 수목원, 토마토 호박 오이 옥수수 등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농작물을 판매하는 노포(路鋪) 등이 스쳐 지나고, 도로에는 차량과 자전거 라이더들이 이따금 씽씽 빠르게 지나간다. 산수로는 경안천으로 내려앉는 산줄기의 굴곡진 가장자리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다. 첫 모퉁이를 휘돌자 ‘오리(梧里, 舊 葛睍洞)’ 표지석이 보이고, 그 좌측으로 경안천 너머로 용마산이 검단산과 줄기를 맞대고 길게 뻗어있다.
국수봉 아래 아늑하게 자리한 오리의 마을회관 앞에는 마을 안내도가 서 있다. 주민자치센터, 보건소 등 공공기관과 용기네, 은혜농원, 미자네, 소나무농원, 홍천댁, 집밑댁, 청초당, 산곡댁 등 가가호호 이름이 번지수와 함께 상세히 표기되어 있다. 안내도만 한 번 훑어보았는데도 그 마을을 둘러보고 나온 듯하다. 옛날부터 마을 한가운데 큰 오동나무가 있었다는 오리는 칡넝쿨이 길을 덮곤 해서 ‘갈현동(葛睍洞)’이라 불리기도 했다는데, 1973년 팔당댐 조성으로 마을과 농경지 대부분이 물에 잠기면서 많은 주민들이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속이 비칠 듯 투명한 스카이블루 톤의 하늘엔 옅은 뭉게구름이 높게 떠 있고, 까마귀들은 서늘한 바람에 절로 신명이 난 듯 저마다 까악까악 목청을 높인다. 다원(茶園) 연수원 입구를 지날 즈음 마주 오는 버스는 좌석이 거의 비다시피 하다. 국사봉 기슭 축대 위 ‘마운틴 블루베리’ 농원 가장자리엔 큰 뿔 사슴 조각상 하나가 산속에서 금방 뛰어 내려오다 멈춰 선 듯 경안천 쪽을 바라보고 있다.
‘팔당호 청정지역 남종면입니다’
‘송이재(松耳峴)’로도 불렸던 성황당 고개를 넘어설 무렵, 표지석이 퇴촌면에서 남종면 금사리로 경계를 넘고 있다고 알린다. 금사리로 들어서자, 길 옆 나무데크 휴게소가 팔당호로 접어들 채비를 하는 너른 경안천 하류를 산줄기 사이로 내놓는다. 마을에서는 닭 울음소리가 연신 들려온다. 약 3미터 간격으로 깃대에 단 태극기가 걸린 난간 너머 밭에서는 농작물을 돌보는 농부의 손길이 분주하다.
장수농장, 형제농원, '장수네 감귤농장' 비닐하우스, 딸기 체험농장 등을 알리는 푯말과 플래카드가 길 양편에 차례로 나타난다. 이 지역은 토마토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감귤이나 딸기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차량과 몸에 달라붙은 복장의 라이더들은 여전히 왕복 이차로 아스팔트 길을 오간다.
달항아리 마을 금사리
국사봉과 금사봉 아래 길쭉한 골에 자리한 금사리(金沙里) 쪽에서 내려와서 경안천에 안기는 개울 위로 놓인 금사교를 건넌다. 경안천은 건너편 용마산 자락과 강심(江心)을 향해 돌출한 분원리의 야산 사이를 지나 팔당호로 안겨들 것이다. 금사교 가장자리에 팔당호로 수몰된 마을을 알리는 ‘달항아리’ 모양의 표지석이 서 있다. 바람에 떠밀린 잔물결이 강심에서 손바닥만 한 부초가 뒤덮은 강의 가장자리로 부처님 법의(法衣) 주름처럼 연신 밀려든다.
가마터가 있던 옛(舊)터란 뜻의 ‘구터’로 불리던 이 마을은 사옹원에서 필요한 사기그릇을 30여 년(1720-1751) 동안 굽던 곳으로, 수몰되기 전 마을 앞 하천에서 사금이 많이 났다고 해서 지금은 금사리(金沙里)라 불린다. 조선 왕조의 관요(官窯)인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이 있던 광주(廣州) 지역에는 가마터 340여 개소가 산재해 있었는데, 학계는 이곳 금사리가 평범한 듯 독창적인 형태와 색상의 달항아리가 주로 제작된 곳이라 추정하고 있다. 포대화상의 배처럼 둥근달을 삼킨 듯 풍만한 몸통의 ‘달항아리’ 모양 마을 표지석은 달항아리로 명성을 떨친 마을이라는 자부심을 한껏 머금고 있다.
호박과 토마토 등을 내놓은 ‘철희농장’ 노포를 지나 비스듬한 오르막길을 휘돌아 분원리로 향한다. 둘레길 4코스의 기점인 망조고개 위에 높이 걸린 인도교 ‘망조교’가 보인다. 그 언저리 ‘찬후농장’ 노포에서는 예순이 넘어 보이는 주민 한 분이 1톤 트럭 짐받이에 실린 총각무를 예닐곱 개씩 작은 단으로 묶고 있다. 농협에 수매하기 위해 정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수도에 근접해 있지만, 소유 토지에 대한 엄격한 개발 통제로 옛 모습 그대로인 고향을 지키며 땅을 일구고 있는 것이 좋은지 싫은지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나 보다.
팔당호는 수도권 2천6백만 주민의 식수원으로 약 2억 5천만 톤의 물을 가두고 있는데, 그 주변은 개발이 철저히 통제된 청정지역이다. 광주시(廣州市)는 경기도 산하 31개 시군(市郡) 가운데 난개발이 가장 심한 지역으로 오명이 높은데, 퇴촌면과 남종면 일대만은 팔당호를 끼고 있어, 난개발의 아수라장으로 전락하는 것을 면했으니, 천만다행이라고나 할까!
분원리(分院里)를 알리는 표지석이 인도교 아래 산기슭에 자리한다. 한줄로 서서 달리는 자전거 라이더들이 일사분란하게 페달을 힘차게 꾹꾹 눌러 밟으며 망조고개 비탈을 넘는다. 자연과 길바닥 위를 자전거로 지쳐 나가는 라이딩은 운동과 함께 동행과의 유대도 끈끈이 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운동으로 보인다.
분원리 쪽으로는 제법 내리막길이라 '고개'라고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슭 축대 벽면의 남종 벚꽃 길, 분원 백자 자료관, 얼굴박물관, 팔당 물안개공원, 수청 나루터, 남종 카페촌, 팔당전망대, 분원 붕어찜 거리 등 남종면 명소들과 남한산성, 분원 도요지, 경안 습지생태공원, 양자봉과 천진암, 무갑산, 태화산, 경기도자박물관 중대물빛공원 등 경기도 광주시의 명소들을 알리는 벽화를 보며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초입 길 오른편에서 벽면이 온통 분홍빛을 띤 5층짜리 모텔이 맞이한다. 붕어찜으로 이름난 분원리는 붕어찜이나 매운탕 등을 파는 식당들과 함께 면 소재지답게 행정복지센터, 농협, 보건진료소 등도 자리하고 있고, 귀여리 쪽으로 가는 길목에는 유일한 고층 건물인 10층짜리 경기도수자원본부도 자리하고 있다.
궁금한 얼굴 꼭두
마을에는 거리를 지나는 차량과 라이더들뿐 주민들 모습은 보이지 않고 새소리와 닭 울음만 가끔 들린다. 퇴촌농협 남종지점 맞은편 거리 안쪽에 자리한 얼굴박물관은 10시부터 개관이다. 박물관 안에서는 일그러진 얼굴, 분노하는 얼굴, 만족하며 초탈한 얼굴, 괴로워하는 얼굴, 또는 그 어떤 얼굴들이 관람객을 맞이할까 자못 궁금하다. 입구의 스탠드 안내판이 '아름다운 만남[V] 마지막 동행자, 꼭두' 기획전이 올해 말까지 진행 중이라고 알린다. 철골 구조 3층 높이 소담한 박물관 전면에서 내 얼굴 사진 한 장 남기고 발길을 옮긴다.
박물관 좌측에는 퇴색한 슬레이트 지붕의 고택 한 채가 쓰러질 듯 위태하게 서 있는데, 지붕 너머로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양쪽으로 능선을 비스듬히 뻗어 내린 예빈산이 팔당호 건너편에서 하늘과 머리를 맞대고 솟아있다. 길 건너 농협 건물을 지나쳐 금봉산 자락에 안긴 분원백자자료관으로 향했다.
분원백자자료관
산수로 우측 금봉산, 해협산, 정암산 등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한 산행지도 안내판을 훑어보고, 그 옆 계단을 따라 올랐다. 옛 분원초교의 반듯한 운동장과 2층짜리 본관 건물이 나타나고, 그 우측 비탈길을 오르면 팔당호를 내려다보며 자리한 철제 건물인 박물관이 방문객을 맞아준다.
건물 전면 너른 잔디밭 마당 가장자리에 사옹원 분원리 석비군(石碑群) 안내판 옆으로 20여 기의 선정비가 나란히 서 있다. ‘사옹원(司饔院) 제조(提調) 능창군 청덕선정비’에는 '영세불망(永世不忘)', '번조관(燔造官) 김 공 계영 선정비'에는 '만세유애(萬歲遺愛)', ‘도제조(都提調) 이 공 시수 덕민유애비(德民遺愛碑)’에는 '벌매종관(罰每從寬)'이라는 글귀가 함께 각인되어 있다.
도제조를 지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선정비는 순조 25년인 1825년 우천리(牛川里)에 세워졌는데, 팔당댐 건설로 마을이 물에 잠기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많은 비석은 자신의 몸에 도자기 제조를 총괄하고 통솔하던 관리들의 이름을 새겨 그들의 선정(善政)을 칭송하고 있는데, 그들이 누구에게 어떤 선정을 베풀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어 궁금증만 더 불러일으킨다.
개관 시간인 10시까지는 10여 분이 남았으나 자료관 안으로 들어서니, 입구 좌측 분원리 달항아리가 놓인 맞은편 옆쪽 사무실에서 관리인이 둘러보라며 친절히 맞이한다. 이 자료관은 2001~2002년 분원초교 부근에서 130년 역사의 조선 왕실 마지막 관요지 가마터가 발견됨에 따라, 분원초교 본관 건물 좌측 위쪽의 폐교사(廢校舍)를 리모델링하여 2003년 개관했다고 한다.
분원(分院)은 조선시대 왕실과 궁궐의 음식 관련 업무를 관장하던 사옹원(司饔院)이 광주에 설치한 백자번조소(白磁燔造所)로 1752년부터 1883년까지 운영하다가 민영화되었는데, 왜(倭)사기와 서양자기의 틈새에서 경쟁력을 잃고, 1900년경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현재 남종면 금사리와 분원리에는 국가사적 제314호로 지정된 340여 개소가 넘는 가마터 유적이 남아 있고 한다.
중국은 최초의 통일왕조 진(秦)나라에서 도자기를 '차이나'라고 부르기 시작하며, 중국을 칭하는 이름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앙소문화, 용산문화 등 도기의 형태로 신석기 시대를 구분할 만큼 도자기 제작 역사가 유구하다. 도기 제작 역사가 고대 상(商)나라 때의 회유도기(灰釉陶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징더쩐(景德鎭; 경덕진)이나, 낙타돈 문화 발상지로 진한(秦漢) 시기부터 유약 도기를 제작했다는 이싱(義興; 의흥)이 지금도 여전히 도도(陶都)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번성했지만 너무나 짧았던 분원리의 도자 역사가 진한 아쉬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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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에 묻힌 옛 영화
전시관에는 분원리 가마터에서 발굴된 도자 파편들, 진사백자 청화백자 접시 등 온전한 도자기 몇 점, 곰방대 쨀줄 박자 개질박 굽칼 조각칼 등 도자기 제작도구, 여주의 물토 양구의 도석 등 도자기 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조선백자의 기원과 종류, 백자 연적 자발 접시 문접시 뚜껑 등 분원리에서 제작한 백자의 종류, 청화모란문발 청화산수문발 청화잉어문발 청화그물문발 청화초화문발 등 갖가지 문양과 그 의미, 번천리 우산리 도수리 장심리 신대리 관음리 무갑리 열미리 도마리 선동리 상림리 송정동 분원리 금사리 궁평리 등 지역 및 시기별 도자기 생산지 등을 사진과 함께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문양 하나 하나는 장수, 다복, 다손, 다산, 검소, 등용, 복, 남녀 화합과 사랑 등의 의미를 담고 있어, 당시 제작된 도자기에서 그 시대 사람들의 보편적인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엿볼 수 있는데, 그 소망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관요 백자의 변화를 접시, 발, 주병, 편병, 장신 항아리, 구형 항아리 등 종류별로 조선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사진과 함께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자료가 흥미롭다. 그중 군용 수통처럼 납작하게 생긴 편병(扁甁)은 먼 길 나서는 여행자가 물병이나 술병으로 삼기에 적합해 보이는데, 조선 후기의 것은 양 옆구리에 끈 고리가 붙어 있어 실용성이 돋보인다.
관리인은 성남시에서 33여 년 공직 생활 후 공모직으로 채용되어 근무 중인데, 일 년에 여섯 번 잔디를 깎는 일이 고되긴 하지만, 지금이 자기 인생의 황금기라고 느낀다고 한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는 우스갯말이 있지만, 마음에 살짝 이는 부러움은 어쩔 수가 없다.
자료관을 빠져나와 분원초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이 내려다보는 놀이터에는 축구공 줄넘기 등이 놓여 있어, 금방이라도 휴식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맞추어 학생들이 교사에서 운동장으로 뛰어나올 것만 같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두 그루가 형제처럼 나란히 서 있는 정문 쪽으로 다가가니 팔당호가 아래쪽에 넓게 펼쳐져 있다.
'세상은 나의 무대'라는 글귀가 적힌 사각 아치형 정문으로 내려선다. 1921년 개교한 분원초교는 현재 재학생 91명, 교원 11명으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데,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이 시간 이 세상의 어떤 무대를 누비고 있을까!
물안개공원까지 2.37km라고 알리는 이정표가 발길을 재촉한다. 좌측으로 팔당호가 온전히 드넓은 수면을 드러냈고, 그 반듯한 수면을 선반 삼아 건너편 검단산과 예봉산을 수석처럼 온전히 올려놓았다. 팔당호 가장자리 수초 사이에 백로 한 마리가 숨어서 물고기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한동안 길가 전봇대 뒤에 숨어서 그 녀석을 스마트폰에 담았다. 호수의 물 내음이 잔뜩 묻은 바람이 불어왔고, 두 다리로 노를 젓듯 그 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물속에 잠긴 우천리
귀여리(歸歟里)로 진입하기 직전에 경기도수자원본부 10층 건물이 우뚝 다가온다. 상하수과 수질관리과 수질정책과 수질총량과 상황실 연구실 방송실 서고 회의실 등을 갖춘 그 건물 9층에 팔당전망대가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로 올랐다. 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근무한다는 안내데스크의 여직원은 찾는 이가 드물어서인지 조금은 무료해하는 듯 보였다.
통유리창 너머로 검단산, 예봉산, 팔부 능선에 수종사를 품은 운길산 등이 담장처럼 멀리 둘러서 있고, 그 아래 팔당호의 가장자리를 따라 팔당댐, 다산 유적지, 양수대교, 두물머리, 양서면 등이 아이맥스 영상처럼 생생한 파노라마를 펼쳐 보인다. 전면에 보이는 소내섬(素內島)은 1972년 팔당호에 물을 담으면서 물속으로 사라진 우천리(牛川里)의 일부분이다.
분원백자자료관 벽면에 전시되어 있던 겸재 정선(鄭歚, 1676-1759)의《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실린〈우천도(牛川圖)〉에서나마 수몰되기 전 마을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농상업에 종사하는 약 60호 300여 명의 주민이 살았던 우천리는 분원리 도자기 운반선과 한강을 오가는 배들이 거쳐 가는 거점이자 우시장이 번성했던 곳이라 한다.
은둔마을 귀여리의 인정(人情)
이 지역은 상수원 보호지역으로 세차, 어패류 채취나 낚시, 야영이나 취사, 가축 사육, 하천구역 농작물 경작, 수영, 선박 운항 등이 제한되고 있다. 안전한 상수원 확보를 위한 여러 규제와 대책, 그리고 재산권 제한에 따른 주민 지원사업 등 수자원본부의 기능이 잘 작동되길 바라며, 다시 호반 둘레길로 들어섰다.
진녹색 반짝이는 날개의 물총새 한 마리가 마른 나뭇가지에서 수평으로 날아 쏜살같이 사라져 간다. 백로 한 마리는 긴 목을 곧게 펴고 미동도 하지 않다가 인기척에 긴 날개를 퍼덕여 강심의 연잎 위에 옮겨앉는다. 티 없이 푸른 하늘과 옅은 구름, 바람에 일렁이듯 가물거리는 호반의 섬들, 호반 가장자리를 수놓은 아기 손처럼 앙증맞은 수련,...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넋을 놓고 이런 풍경을 바라다보다가 셔터를 누르곤 한다. 둘레길 모퉁이 커피 트럭이 자리한 곳을 지날 즈음 오토바이 행렬이 머플러가 터질 듯 굉음을 내뱉으며 지나가고, 혼자서 힘겹게 페달을 밟는 라이더는 고독하게 비탈길을 지쳐 오르고 있다.
귀여리(歸歟里)로 들어서서 둘레길 3코스 기점인 물안개공원 입구에 닿았다. 곶처럼 길쭉한 모래둑에 둘러싸인 호수 가장자리는 작은 잎 연, 큰 잎 연, 수초 등이 어우러진 수상 정원이다. 도로 옆 마을 입구에 생활도자기와 농산물을 판매하는 노포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농산물 판매점 '현순농장'에서 삶은 찰옥수수 한 봉지를 사자, 주인아주머니는 산에 간다고 하니 달달한 것이 생각날 것이라며 초코파이 두 개를 덤으로 넣어 준다. 마을 입구 원두막처럼 생긴 사각 정자에 앉아, '오*온 초코파이 情'이라 적힌 봉지를 뜯어 한입 베어 무니 귀여리의 달콤한 인정(人情)이 입속에서 사르르 녹는다.
금봉산, 금사봉&국수봉
귀여2리에서 금봉산으로 오른 후, 금사리 뒤쪽 가마고개에서 둘레길 4코스로 합류하여, 국사봉을 거쳐 보건소로 원점 회귀하는 노정을 이어간다. 귀여2리는 반듯하고 튼튼해 보이는 대문 안에 너른 마당을 낀 부촌 느낌이 풍기는 주택들이 좁은 골을 따라 널찍한 거리를 두고 10여 호 자리하고 있다. 마을회관 앞을 지나고, 금봉산과 국사봉 능선 사이로 난 골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자, 인적은 없는데 오소리라도 달려드는지 고래고래 소리치는 닭 울음소리만 간간이 들려온다. 무성한 초목이 깔린 임도를 경운기 바퀴 자국 위를 밟으며 오르자, 산정으로 향하는 온전한 등로 대신에 가파른 사면이 기다린다. 능선 마루에 닿을 즈음 '사유지'라는 경고문 푯말이 붙어 있는 그늘막이 둘러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이다.
능선 길에 지천으로 깔린 밤송이 껍질 사이에서 알밤 몇 개를 주워 깨물어 보았다. 알밤은 지나온 계절의 온갖 풍상을 안으로 끌어안았는지 단단하고 여물다. 그때 갑자기 능선 앞쪽에 늑대를 닮은 셰퍼드 한 마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어, 한동안 멈칫 그 자리에 발이 얼어붙어 있었다. 어깨에 총을 맨 포수 등 두 분이 셰퍼드를 뒤따르는 모습에 긴장이 풀린다. 멧돼지 포획 활동 중이라는 그분들은 셰퍼드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방을 경계하면서 금봉산 산정 아래쪽을 휘돌아 걸음을 옮긴다.
계단이 없는 피라미드처럼 가파른 사면을 200여 미터 치고 오르자, 귀여리와 필당호가 내려다보고 있는 해발 235.5미터 금봉산의 표지석이 발치에서 반긴다. 산꾼의 의례인 양 표지석을 벗 삼아 인증 사진 한 장을 남기고, 남부니 고개로 향했다. 문명의 이기에 의지하더라도 산에서는 방향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아, 금봉산 아래 여러 갈래 줄기와 골 사이에서 여러 번 방향을 놓치고 주춤거리며 다시 고쳐 잡았다.
풍파에 꺾여 쓰러진 소나무는 등로를 가로막았고, 넝쿨식물은 쓰러진 소나무 둥치를 터전 삼아 넝쿨에서 잎을 촘촘히 세웠다. 무너진 문명 위에 새로운 문명이 움트고, 쓰러진 죽음 위에서 새 삶을 일구는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자연도 말없이 생사의 무한 반복을 이어간다. 넓고 활달한 등로를 농부가 마른 밭을 쟁기질 해놓은 듯 멧돼지가 군데군데 들쑤셔 놓았다.
금봉산에서 600여 미터 지점에서 첫 이정표를 지나서 조금 더 전진하니, 팔당호반 둘레길 3코스 망조교 기점 1.25km 지점 이정표가 가마고개와 국사봉 쪽 방향과 거리를 알려준다. 쭉쭉 뻗은 소나무 숲이 조림과 관리가 잘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데, 몇 년 전 늦은 봄 M과 함께 올랐던 갑갑함이 느껴지던 정암산과 해협산의 등로에 비할 바 없이 쾌활하다. 소쿠리 테두리 우측에 해당하는 국사봉 맞은편 250미터 고도에 놓인 벤치가 반갑기 그지없다. 등산화를 벗고 벤치에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서, 배낭 속의 깎은 배 몇 조각과 귀여리에서 확보한 옥수수와 초코파이 한 개로 허기를 달래니 힘이 다시 솟아오른다.
가마고개를 지나 구터고개로 향하는 길, 등로 주변 몇몇 노송은 재선충병을 비껴가지 못했는지 광주시청 산림과에서 2024년 상반기에 아세타미프리드와 아마맥틴벤조에이트 혼합제제를 투여했다는 긴급방제사업 표식을 명찰처럼 가슴 높이 줄기에 하나씩 달고 있다.
전국의 산을 누비며 도처에 산객들에게 요긴한 이정표를 남긴 ‘준.희’님도 이 길을 다녀가셨나 보다. 피앙세를 먼저 하늘로 보낸 ‘준’님의 아련한 사부곡(思婦曲)인 양 리본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린다. 이 코스의 산행 등로에는 밤나무들이 많아서 곳곳에 떨어져 나뒹구는 알밤을 줍는 재미도 쏠쏠하다. 둘레길은 금사리와 도수1리를 연결하는 구터고개로 주저앉았다가 국사봉 줄기를 따라 다시 일어선다.
구터고개에서 맞주쳤던 산객을 좇아 벤치 여러 개와 돌탑 서너 기가 자리한 널찍한 금사봉으로 올라서니, 망조고개를 지나 경안천으로 내리뻗은 능선 좌우로 경안천과 팔당호를 비롯한 지나온 둘레길 능선의 개략적인 윤곽이 나뭇가지 사이로 훤히 내려다보인다. 해발 207.3m 국사봉 정상을 백여 미터 남겨두고, 그 턱밑에서 80미터 지점에 있다는 약수터를 지나치고, 가파른 비탈에 놓인 나무 계단을 지나 4각 정자가 놓인 정상에 올라섰다. 정자에 나란히 걸터앉은 남녀 한 쌍은 인기척에 아랑곳없이 주고받던 세상사 얘기를 끊이지 않고 이어간다.
국사봉(國思峰)과 국수봉(國守峰)
둘레길 4코스의 기점인 보건소까지는 약 1km를 남겨 두고 있다. 하루를 마감하는 장대한 일몰의 세레머니를 펼칠 채비라도 하려는지 티 없이 맑던 하늘에는 옅은 구름이 깔렸다. 반대편 사면과는 달리, 보건소 기점으로 내려서는 능선은 내리꽂힐 듯 가파른 비탈이다.
경안천 넘머 남한산성을 마주하는 가파른 사면이 산행 내내 잊고 있던 병자호란과 쌍령전투를 상기시킨다.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6개의 ‘국수봉(國守峯)’은 병자호란 때 청군에 쫓겨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구하려고 달려와서 쌍령전투를 치른 지방 근왕군의 원혼이 서린 곳이다.
적군과 맞서 진지를 구축했던 ‘국수봉(國守峯)’과 달리, 이곳 ‘국사봉’은 그 이름에 달린 내력을 찾을 수가 없는데, 한자로 ‘국사봉(國思峰)’이라 포기하지 않을까 짐작된다. 귀여리(歸歟里) 마을 이름은 중종(中宗) 때의 대사간 한승정(韓承貞, 1478~1543)이 이곳으로 내려와서, ‘귀여정(歸歟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둔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승정은 동문수학이자 반정(反正)으로 왕권을 쥔 중종(中宗)의 부마가 된 권신 김안로의 전횡을 간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했다고 하니,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국사봉(國思峰)’이라는 산 이름에 담았지 않았을까!
보건소 건너편 도로에 접한 산자락으로 내려서며 팔당호반 둘레길 탐방을 마무리하는데, “앞으로 우리는 주어진 여건에 더욱 충실하여 마을을 발전시키고 국가에도 공헌하자.”라는 귀여리 마을 표지석의 마지막 글귀가 귀에서 쟁쟁 울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