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 산 기행

사량도의 밤과 지리망산

인산(仁山) 2024. 9. 12. 10:29

통영 사량도 지리산 산행

온 밤을 전전반측하다가 6시경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은 아직 어둠이 물러나지 않았다. 하늘엔 샛별이 초롱초롱하고 포구바다 위로 불빛이 아른거린다.

금평항에서 출발하는 윗섬을 한 바퀴 도는 06:50발 첫 버스를 타고 산행 기점인 돈지에서 내렸다. 돈지 항이 어둠에서 깨어나고 있다. 우뚝 솟은 지리산 암릉이 마을 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사량초교 돈지분교가 그 밑에 아늑하게 안겨있다.

사량도 지리산은 2002년 산림청이 한국의 100대 명산 중 하나로 선정한 산이다. 그 때문인지 많은 섬사람들은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뭍으로 나갔지만 더 많은 수의 육지인들이 좋은 계절 낭만과 풍광을 찾아 이 섬으로 몰려든다고 한다.

통영 고성 남해 등 3개 시군에 둘러싸인 사량도, 지금은 한려해상국립공원 한 가운데 자리한 관광 요지이지만, 어제 진촌 마을을 둘러볼 때 보았던 고려 말 이곳에 진을 치고 왜구를 격퇴한 최영 장군의 사당과 조선 만호들의 선정비가 있고 <난중일기>에 열 네 차례 언급되고 있는 점 등은 고려와 조선시대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려준다.

돈지마을 산자락 입구 비탈길에 누군가가 쌓은 수 십 기의 돌탑이 서있다. 경사가 가팔라지는 지점에 무사산행을 기원하듯 오른 손에 연꽃 봉오리 한 송이를 든 화강석 불상이 돌로 쌓은 집에 가부좌하고 있다.

좌우로 바다가 뵈는 능선으로 올라서니 게으른 겨울 태양이 항구 건너 산줄기 위로 부시시 얼굴을 내민다. 바다를 지나는 배의 엔진 소리도 솔숲 사이로 들려온다.

정상으로 가는 능선은 판넬처럼 결이 난 바위가 켜켜이 쌓여 피라미드처럼 하나의 거대한 암봉을 이루고 있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암벽 아래 앉아 사량도에 딸린 작은 섬 수우도와 내지항 쪽으로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해안을 따라 난 일주도로를 내려다보며 숨을 고른다.


날씨가 좋은 봄이나 가을의 주말이면 줄을 지어서 오를 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명산을 온전히 나 혼자 차지하고 걷는 기분이 묘하다. 멀리 남녀 한 쌍만 지나온 능선을 따라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발길을 재촉하여 돈지에서 2.3km 남짓 거리 해발 398미터 지리산 정상에 올라섰다. 평지처럼 평평한 암봉에 서니 시야가 사방으로 툭 터였다. 뒤로 공룡 등줄기처럼 지나온 암릉이 누워있고 앞 쪽엔 옥녀봉 봉오리가 봉긋 솟아있다.

가야할 불모산 쪽으로 서니 좌측 아래 내지항이 한 폭의 그림 같고 넓은 바다 건너 고성의 산군은 손에 잡힐듯 선명하다. 우측으로는 아랫섬과 사이에 좁고 긴 바다가 아침 햇살을 눈부시게 반사하며 누워 있다.

해발 399미터 불모산 암릉을 아래쪽으로 우회해서 길을 잡았다. 방목하는 염소 떼 한 무리가 산객을 피해 가파른 절벽으로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옮긴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강인한 기품에 활기차 보이는 것은 자유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한 암봉 불모산 아래를 지날 때 바위 절벽 가운데 동굴처럼 뻥 뚫린 공간에 둥근 바위가 걸려있는 달바위가 눈길을 잡는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서 험한 바위 위로 난간이 있는 데크를 지나고 계단을 오르면 해발 303미터 가마봉이다.

섬 위 아래쪽으로 대항과 옥동항을 비롯한 작은 마을들이 군데군데 해안을 따라 자리하고 있다. 가마봉과 옥녀봉 사이에 낙타 등처럼 솟은 암봉들을 출렁다리 두 개가 이어주고 있다. 좌우로 급전직하 바다가 보이는 2,30여 미터 길이의 출렁다리 두 개를 연달아 지나갈 때 찌릿찌릿 오금이 저려온다.

암릉 위에 놓인 데크와 암봉의 아찔한 계단을 연이어 오르내리다 보면 해발 281미터 옥녀봉이 마을에서 보이던 뾰족한 모습과 달리 제법 너른  정상을 보여준다.

홀아비 아래 처녀로 성장한 옥녀는 어느 날 자신을 범하려 막무가내인 아버지에게, '마을 뒤 봉우리에 올라가 있을 테니 멍석을 쓰고 소 울음을 내며 그곳까지 기어서 올라오면 허락하겠다'며 위기를 모면한다.

수심(獸心)의 충동에서 벗어나 선한 사람의 본성을 되찾으라는 간곡한 애원이 물거품이 되자 결국 그녀는 벼랑에서 뛰어내리고 말았다는 옥녀봉의 슬픈 전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전설은 어긋난 욕망의 끝엔 비극적 파국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 경고하고 있다.


오르내리던 암릉과 봉우리들을 모두 지나고 이제 금평항 쪽으로의 내리막길이다. 여객선이 드나드는 금평항이 있는 진촌마을이 가까워지며 띄엄띄엄 올라오는 산객들과 지나친다. 그들은 '출렁다리까지 멀었냐'고 묻고 나는 가벼운 인사와 함께 '여기까지 얼마나 걸렸냐'고 물어본다.

뭍으로 나가는 배편이 두 시간 간격이다. 집으로 돌아갈 갈이 멀어 정오 출항시간에 맞춰보려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시간에 자꾸 마음이 쫓긴다. 시간은 때론 문제를 해결하고 아픔도 치유해주는 해결사, 그렇지만 한 번 뒤처지거나 놓치면 돌이킬 수 없이 일을 엉키게 하고 낭패를 안기기도 하는 무섭고 무심한 존재다.

진촌 마을로 내려서며 윗섬 일주도로를 사이에 두고 저편에 솟아 있는 고동산을 어제 참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든다. 하룻밤 묵은 포구 마을이 낯익은 친구처럼 '힘든 산행 수고했다'며 친근하게 맞이해 주는 듯하다.

다시 들른 ㄷ여관엔 주인 할머니와 막내 아드님은 자리를 비웠다. 정오가 지나지 않아서인지 퇴실할 때 모습 그대로인 3호실에서 간단히 땀을 씻고 여객선터미널에서 정오에 출발하는 배편으로 티켓을 바꿨다.

주말이라 그런지 어제보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선착장에 들어온 '사량호'에서 내렸고 어제와 비슷한 숫자의 승객이 배에 올랐다. 따뜻한 객실에 몸을 구부려 뉘었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썩 좋지 않은 몸과 날씨 탓에 지리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지리산(智異山), 바랄 망(望) 한 자를 더한 지리망산(智異望山)이 멀어지는 내게 작별인사를 건넨다.

사량도, 지리산행 프롤로그..

통영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사량도 행을 감행하기로 했다. 몸은 지쳤지만 통영에서 지척이고 이 섬에 있는 지리산이 아름답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어 꼭 한 번 찾아봐야겠다고 벼뤄오던 터였다.

사량대교가 상도와 하도를 이어주는 사량도(蛇梁島), 뱀이 많이 서식해서, 섬이 뱀처럼 길어서, 또는 두 섬 사이를 흐르는 해협을 이르던 말에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사량도 금평 항으로 들어가는 카페리호가 출발하는 여객선터미널은 통영 시내에서 멀찍이 떨어진 가오치 항에 자리한다. 삼천포에서는 사량도 내지 항을 오가는 여객선이 운행한다.

3시에 출발할 '사량호'가 사량도에서 가오치 항으로 막 들어오고 있다. 섬에서 뭍으로 나오는 승객은 고작 스무 명 남짓이다. 개찰구 앞에서 승선을 기다리는 승객들이 내리는 승객들과 서로 아는 사이인 듯 가벼운 인사말을 건넨다.


입항한 지 20여분 만에 승객을 태운 배가 금평 항으로 출발했다. 1층 여객실 너른 평상 위에 열 댓 명 학생 장년 노인 등 승객들이 끼리끼리 모여 자리를 잡았다. 하나같이 익숙한 듯 겉옷을 벗어 덮고 내 집처럼 편하게 눕는다. 2층 객실도 비슷한 모습이지만 승객들이 여성들인 점만 다를 뿐이다.

나처럼 객지에서 온 등산객이나 낚시꾼 몇몇만 갑판에 서서 좌우 전방으로 크고 작은 섬들이 펼치는 장관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출발한 지 40여분 만에 섬에 도착한 배는 겨울 한낮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쬐는 선착장에 승객들을 토해놓았다.

객실 옆에 않아 있던 한 분이 '외지서 오시나 보네요' 라며 말을 건넨다. 몇 마디 나누다 보니 그저께 전화로 예약 문의를 했던 선착장 옆 ㄷ여관 주인의 막내아들이란다. 은퇴 후 부산에 거주하며 주말에는 섬에 혼자 계시는 팔순 노모를 찾는단다. 한때 6천이던 인구가 지금은 천 여 명 정도로 줄었단다.

사량도 지리산은 날씨가 맑으면 경남과 전라도에 걸쳐있는 지리산이 보인다고 하여 '지리망산(智異望山)'이라고도 불린단다. 그렇다고 이 산에서 지리산을 보았다는 산행후기를 본 적이 없는데, '날씨가 맑으면'이라는 전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직선거리로 백 팔십 여리나 떨어진 지리산이 정말로 보일까 하는 의구심이 일었지만, 이곳 토박이인 ㄷ여관 아드님은 실제로 지리산이 보인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그를 따라 ㄷ여관으로 가서 짐을 풀고 자투리 시간에 고동산 둘레길을 둘러보기로 했다. 사량대교 북단에서 해안과 고동산 정상으로 가는 길로 나뉜다.

마른 풀 섶에서 작은 새들이 인기척에 우루루 솔숲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해발 217미터 고동산 정상에 서니 건너편에 우뚝 솟은 옥녀봉, 금평항, 하도의 칠현산과 사량대교, 대항 등이 눈에 들어온다.

슬픈 전설을 가진 높이 281m 옥녀봉은 봉곳한 산봉우리가 여인 가슴을 닮았고 산세가 여인이 거문고를 타는 형상이라고 한다. 고동산에서 칠현산 일곱 봉우리에 거문고 줄을 각각 하나씩 이어 옥녀가 거문고를 탔다는 옥녀탄금형 지형에 꼭 들어맞는다.

고동산과 옥녀봉 사이 대항고개로 내려서기까지 산길은 온전히 나 혼자다. 입도하는 여행객이 거의 없는 여행 비수기라 섬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고동산과 옥녀봉 사이 윗섬 일주도로 2차선 아스팔트로 내려섰다. 고갯길은 간간이 승용차가 지나갈 뿐 인적이라고는 없다.

도로 옆에 동백이 활짝 꽃잎을 폈고 지나온 고동산 능선 위로 내일이 보름이라고 소곤대듯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둠이 내리는 사량면사무소 앞엔 진촌 마을 우물에서 발견된 비석 3기 등 조선 만호들의 선정비 다섯 기가 지키고 섰고 광장같이 넓은 도로는 텅 비었다. 고동산 아래 자리한 진촌 마을을 돌며 최영장군 사당, 옛 우물, 소담한 공소성당과 교회 등을 둘러봤다.


금평마을 맨 뒤 고동산 기슭에 자리한 진촌마을 경로당 난간에 서니 불 밝힌 사량대교, 칠현산 능선, 상 하도 사이로 열린 바다, 붉은 저녁노을을 머리에 인 지리산 능선과 그 끝에 뾰쪽한 옥녀봉 봉우리가 좌에서 우로 파노라마를 눈앞에 펼쳐놓았다. 마지막 화객선이 금평항을 빠져나가고 있다. 스스로 들어와서 온전히 섬에 갇힌 셈이다.

좁은 여관방으로 돌아오니 켜놓았던 보일러가 방바닥을 뜨끈하게 데워놓았다. 산에 미쳤나, 남해 작은 섬에 든 까닭을 곰곰 생각해 봐도 쉬이 답이 찾아지지 않는다. 명치에 뭉쳐있는 무언가가 가슴을 누르고 기를 막아 답답하다. 섬은 고요하고 창 밖 바다는 잠잠한데 전전반측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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