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 산 기행

경주 남산, 불국토의 꿈

인산(仁山) 2024. 8. 30. 14:21

572돌 한글날이다. 6시 반 경 연제동 세관 숙소를 나서는데 동네 가로수에서 까치들이 평소의 까마귀를 대신해서 깍깍깍 거리며 호들갑스럽게 아침인사를 건넨다.


부산역발 KTX 열차가 30여 분 만에 신경주역에 도착했다. 시내버스가 선도산을 좌로 휘돌아 터미널 쪽으로 들어서자 오른쪽 멀리 너른 들 한가운데 긴 병풍처럼 솟아있는 남산이 보인다.

경주시내에 내려 노서리 고분군을 가로질러 황리단길 입구에서 용장리행 버스를 탔다. 황남대총 천마총 등 거대한 무덤들의 완만한 선이 천의무봉 넉넉한 달항아리의 곡선과 닮았다.

나지막하고 품위 있는 기와 고택들이 늘어선 시내를 벗어나 남산 서편과 형산강 사이로 난 포석로를 따라 천관사지 나정 포석정 삼불사 망월사를 거쳐 용장리에서 버스를 내렸다.

일단의 산객들이 모여있는 마을 뒤 고위봉 쪽으로 오르는 들머리에서 용장 계곡 위로 놓인 앙증맞은 출렁다리를 건너면 계곡이 동행하자며 졸졸졸 소리 내며 조른다.

길이 3km 용장 계곡은 남산 50여 개 계곡 중 제일 크고 22개 절터가 확인된다고 한다. 열반재, 이무기 능선, 설잠교 세 갈래 코스 중 천우사와 관음사를 둘러볼 요량으로 열반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계곡을 건너 포장도로를 오르니, 시골 황토집처럼 낮고 지은 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천우사가 나온다. 스님과 보살 두 분이서 시루떡을 쟁반에 담으며 공양 준비에 바쁘다.

연초록 이끼를 머금은 자갈이 드러난 비탈진 시멘트 길을 오르면 열반곡 제3 사지의 금방이라도 자빠질 듯 기울어진 채 앞을 막아선 '큰 곰바위' 앞에 관음사가 자리한다. 사랑채 마냥 작은 대웅전 문고리를 당기니 한 척 크기 하얀 돌부처가 지키고 계시다. 그 오른쪽 비탈의 산신각도 잠겨있고 인기척이 없어 버려진 절처럼 보인다.

지루한 비탈길을 올라 열반재에 올라서니 안내판이 열반곡에 얽힌 전설을 들려준다. 권력과 재력을 가진 뭇 남성들의 프러포즈를 거절하고 이 계곡으로 찾아든 신라 각간의 외동딸은 지장보살의 안내로 고개 너머 천룡사 부처님의 열반 세계로 들었다고 한다. 남산 불국토를 둘러보기도 전에 벌써 열반재에 오르다니 일러도 너무 이르다는 어쭙잖은 생각이 들었다.

 

고위봉까지 500여 미터 이어진 능선에 들어서면 앞을 가리던 숲이 걷힌다. 용장리 앞 들판 너머로 망산 단석산 벽도산 등 가까운 산군 뒤로 겹겹 산줄기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듯 아득하다. 그 산군들은 멀찍이서 옥좌에 앉은 지존을 옹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위봉은 해발 494미터로 숲에 가려서 별다른 조망이 없다. 지난 주말 불어닥친 태풍 콩레이 때문인지 잔솔 가지가 꺾이고 솔방울이 떨어져 산길 바닥에 분분히 흩어져 있다.


용장골 코스와 달리 칠불암 쪽 능선은 산객들이 많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삼삼오오 산을 오르며 모두 유쾌한 표정이다. 크게 힘들지 않고 지붕 없는 박물관에 소풍을 온 듯 할터이니 당연하지 싶다.

 

백운재에서 칠불암까지 1.5km여는 평탄하고 호젓한 솔길이다. 금오봉과 갈리는 지점부터 칠불암 쪽 350m는 암반 길이다. 그 길 중간에 1200여 년 동안 신선암 바위 절벽을 지키고 있는 마애보살 반가상을 만날 수 있다. 남산 동녘 들판과 멀리 산군들이 펼치는 파노라마가 장관이다.

신선암에서 암벽길을 백 여 미터 내려가서 산죽이 무성한 좁은 오솔길을 지나면 칠불암이 나온다. 유리창으로 된 옆 벽면이 칠불암 쪽을 향한 암자에 스님과 신자들이 빼곡히 앉아 예불이 한창이다. 마침 예불이 끝나자 암자 측면에 딸린 공양간 보살님들이 국수를 한 그릇 권한다. 묵은 김치와 버섯을 썰어 넣은 국수 한 그릇에 허기가 가시고 마음까지 든든해진다.

 

예불에 이어 비구스님의 설법이 이어졌다. "늘 깨어 있으라"는 요지의 스님 설법에 암자 안과 마루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만면에 미소가 그득하다.


칠불암을 뒤로하고 금오봉 방향 이영재로 이어진 봉화대 능선에 들어서자마자 '용장계 지곡 3층 석탑'이 있다는 이정표가 나왔다. 능선 아래 밤송이가 나뒹구는 기슭 250미터쯤 적막한 숲에 둘러싸인 4.9미터 높이 전탑은 외로워 보였다.


봉화대 능선 중간중간 전망 좋은 바위들은 돌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겼거나 배낭을 내려 허기를 달래는 사람들이 차지했다. 나도 용장골 쪽이 훤히 내려다 뵈는 절벽 위 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목을 축였다.

 

잠시 찔끔거리던 빗방울은 멎었고 능선을 넘는 바람은 시원하다. 용장골과 국사골을 이어주는 이영재까지 내려가던 길은 다시 일어서며 금오산까지 1.7km라고 알린다.


이영재를 지나면 비포장 임도가 마중 나오며 삼화령 쪽으로 인도한다. 삼화령은 금오봉, 고위봉과 함께 높은 곳을 뜻하는 '수리' 중 하나로 '삼화수리'로도 불린단다. 삼화령 위 봉우리에는 불상은 간데없고 지름 2미터 연화좌대 하나가 남아 있다.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 스님이 매해 삼월 삼일과 구월 구일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니, 미륵불은 중생을 구제하러 서둘러 어디론가 떠난 것일까?


금오봉을 500m쯤 남기고 용장리 쪽으로 뻗은 능선 아래 용장사지에는 삼층석탑과 마애여래좌상, 그리고 머리 부분이 없는 삼륜 대석 불좌상이 남아 있다. 법당 터 위 삼면이 툭 트인 암반을 기단 삼아 선 삼층석탑은 하늘에 닿을 듯 우뚝하다. 매월당 김시습이 용장사에 머물며 우리나라 최초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다니 감회가 남다르다. 발은 무겁고 몸은 지쳐오지만 왕복 500m를 오르내리는 수고가 대수로울 까닭이 없다.

 

용장사지에서 능선으로 되돌오는 길에 구름으로 덮였던 하늘이 개이고 햇빛은 따갑게 내려쬐고, 벌들은 임도변에 핀 들꽃에 취해 있다.

허름한 차림새의 진신 석가를 알아보지 못한 효소왕 전설이 전하는 비파골을 지나자 그 턱밑까지 임도가 안내하는 금오봉 정상이 나타났다. 해발 468m 정상은 둘러선 나무에 조망이 막혔고 다만 미려한 글자체로 '金鰲山'이라 적힌 표지석이 정상임을 알린다. 삼릉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삼릉계곡 위 절벽의 마애 석가여래좌상은 사모바위에서 한눈에 들어온다. 9C경 양식의 6미터 높이 거대 불상은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바위를 뚫고 나와 앉은 옆모습이 또렷하다.

 

본격적인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전 삼릉 능선 마루에 너른 마당처럼 바둑바위가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마련한 엽서함과 남산 정취가 담긴 엽서가 놓여 있어 한 장 적어 함에 넣었다.

 

안내판만 보이고 행방이 묘연한 삼릉곡 제9 사지 선각 마애불을 지나고, 두 능선이 만나는 협곡 위에 자리한 상선암을 거쳐 삼릉계곡으로 내려서니 물소리가 반겨준다. 계곡 중부 능선에 얼굴 부분을 복원했다는 석조여래좌상이 자리하는데, 좌대와 광배까지 온전히 갖추고 있어 금방 조각해서 세운 듯하다. 보살 한 분이 향초와 음식을 올리고 절을 그치지 않는다.

옆을 따라오며 손짓하는 삼릉계곡을 외면하지 못하고 맑고 찬 물에 땀을 씻었다. 용틀임하며 하늘로 치솟은 수 백 년 된 아름드리 소나무가 무성한 삼릉 숲이 장관이다.

 

삼릉 솔숲을 지나 삼불사로 난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 염불소리 대신 'El Condor Pasa' 연주음이 잔잔히 흘러나오는 망월사에 들렀다가 버스를 기다리며 남산을 돌아다봤다. 작지만 크고 소담하지만 웅장하고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감흥과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경주 남산, 천 수 백 년 전 신라인들이 꾼 불국토의 꿈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듯 바람에 실려왔다.

 

기다린 지 한참만에 시내행 버스에 올랐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신라의 달밤' 한 구절을 흥얼거려 본다.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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