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태산, 원시의 숨결
방태산 산행을 앞두고 지도를 살펴보다가 주변의 인제 현리 등 낯익은 지명들이 눈에 들어왔다. 산행 들머리인 방태산 휴양림으로 향하는 산행 버스는 서울 양양고속도로 인제 IC에서 내려 현리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는 기린면을 지나간다.
방태천과 내린천이 하나로 합쳐지며 소양강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 기린면 현리, 일병 시절 두 달 동안 복무했던 제3급 양대가 그곳에서 지척이다. 제1군수사령부에 새로 생긴 감찰 입회병으로 예하부대의 군수물자 수불 업무를 확인하던 시절 산하 여러 보급부대 가운데 하나였다. 군 복무 시절이나 공복인 지금이나 여러 객지를 떠도는 것은 타고난 팔자인가 보다.
현리에서 방태천을 따라 난 길을 구불구불 오른다. 병풍처럼 좌우로 산이 첩첩 높이 솟은 길 옆 산비탈을 따라 감자 옥수수 더덕 등 농작물이 자라는 밭이 펼쳐지고 그 사이사이에 그림 같은 주택들이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다.
두 달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부대에서는 유난히 많은 기억이 있다. 바리깡으로 동료끼리 이발을 해주던 일, 가루 석탄을 물에 개켜 페치카에 넣던 부대원들, 막사 뒤편 하사관 숙소 비오큐에 들렀던 일, 방태천으로의 나들이 등이 아련히 떠오른다.
손 안의 만능기기인 스마트 폰이 있고 교통도 사통팔달인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통신과 교통 사정이 열악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인제나 원통 등 강원도 산간에 위치한 군부대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말이 나올 만큼 누구나 기피하는 오지였다.
48인승 버스는 아침가리골 탐방에 나설 승객 절반쯤을 진동계곡에 내려놓고, 산행 들머리인 자연휴양림 쪽으로 향했다. 휴양림 입구에서 버스를 내려 계곡을 끼고 난 포장도로를 따라 휴양림 제1야영장을 지나 제2야영장 쪽으로 향했다. 산행 들머리 격인 제2야영장 직전 오른쪽 계곡의 이단폭포가 우렁찬 소리와 흰 물줄기로 산객을 맞이한다.
방태산은 사방으로 긴 능선과 아침가리골, 적가리골, 골안골 등 풍광이 뛰어난 깊은 계곡을 거느린 육산으로 방동리에 1997년 개장한 자연휴양림이 있다. 오늘 산행은 자연휴양림에서 출발해서 주억봉, 구룡덕봉, 매봉령을 지나 출발지점으로 회귀하는 코스다.
차량이 빼곡한 야영장 주차장을 지나 들머리로 들어섰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만나는 좌우 갈림길에서 우리는 산행대장의 조언대로 가파르지만 길이가 짧은 주억봉 쪽으로 오르는 코스를 선택했다.
경쾌하고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 위로 놓인 목책교 서너 개를 좌우로 건넌다. 계곡은 물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가까이 다가오길 반복한다. 반대쪽으로 돌고 내려오는 부지런한 산객들도 하나 둘 지나쳐간다. 희미해지는 계곡 물소리와 함께 평탄하던 길은 가파른 계단으로 바뀌며 주억봉 능선 쪽으로 치고 오른다.
침목 계단 앞에서 땀수건을 손목에 매달고 카메라를 든 백발의 노산객과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W산악회 고문이라는 그분과는 산행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젊은이에 결코 뒤지지 않는 노익장이 부럽다.
다시 푹신한 진흙 길에 이어 팔부능선쯤에서는 산신령이 망태기에 담아 두었던 바윗돌을 아래쪽으로 쏟아부은 듯한 너덜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입에서 절로 '억' 소리가 터져 나올 듯 가파르고 길다.
능선 마루 부근엔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있는 고목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거친 환경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고목들의 상처가 빛나는 훈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색 잎이 무성한 함박 나무에는 듬성듬성 하얀 꽃이 달렸는데, 어떤 꽃은 싱그럽고 어떤 꽃은 말라비틀어졌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골라가며 주억봉 아래 주능선으로 올라섰다. 나무 그늘이 진 너른 능선 마루 여기저기에 무리 지어 앉은 산객들이 배낭을 열고 허기를 달래고 있다. 앞서 올라간 M을 쫓아 주억봉으로 발을 옮겼다.
해발 1,444미터 방태산 정상 주억봉에 올라섰다. 정상 주변에 산객들이 앉거나 서서 전망이 툭 터인 남쪽과 동쪽으로 펼쳐진 산줄기를 내려다보며 남은 산행을 위해 기운을 충전하고 있다. 주위에 지천으로 핀 노루오줌 꽃과 간간이 섞여 있는 범꼬리 꽃, 참조팝나무꽃, 이질풀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주억봉을 뒤로하고 좌측으로 골짜기를 안고 구룡덕봉까지 휘도는 1.8km여 능선은 온갖 초목으로 뒤덮여 원시의 기운이 풀풀 풍기는 길이다. 가파르고 힘든 구간을 지나온 뒤 맞이한 평탄한 능선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녹음 짙은 숲 오솔길은 부드러운 선율의 교향시 속을 거니는 듯 마음이 평온해진다.
해발 1388미터 구룡덕봉 정상 너른 초장에는 삼면 가장자리마다 전망 데크가 놓여 있다. 지척인 듯싶은 주억봉이 길게 누운 능선 저 멀리에 우뚝 솟아있다. 시원스러운 전망과 함께 몰아치는 서늘한 바람이 좋아서 발길을 옮길 마음이 들지 않는다.
매봉령으로 내려가는 길 옆 오른쪽 완만한 능선은 온갖 이름 모를 관목과 풀들이 넘실대는 초목의 바다다. 산길과 임도로 갈라졌던 700여 미터의 길은 매봉령에서 다시 하나로 만난다.
매봉령에서 휴양림 주차장까지 3.3km는 올라올 때의 코스에 비해 다소 완만하지만 고도 700여 미터를 내려가야 하는 녹록지 않은 길이다. 시원스레 뻗은 나무들 사이로 부는 바람이 좋다. '어~시원하다.'는 말에 '짹짹짹 찌르찌르르'하고 새들이 화답한다.
고도 800m쯤에서 타고 내려온 능선이 계곡으로 내려앉으면서 시원한 물소리가 다시 반긴다. 이쪽저쪽 여러 작은 계곡들이 한 곳으로 모이면서 물소리는 더욱 우렁차고, 아래위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화음을 맞추듯 조화롭다.
넓어지고 완만해진 경사의 계곡 너럭바위마다 산행을 마친 산객들과 이른 피서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거나 물에 발을 담그며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졌다.
들머리이자 날머리 격인 제2야영장 주차장으로 내려섰다. 휴양림 매표소로 가는 길에 다시 만난 이단폭포, 서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그 물줄기 앞을 어른 아이 등 많은 사람들이 떠날 줄 모른다.
폭포에서 멀찍이 떨어진 바위 바닥이 널찍한 계곡으로 내려가서 등산화를 벗어 발을 담그고 땀을 씻었다. 산행의 피로가 싹 달아나는 느낌이다. 군화를 벗고 방태천에 발을 담그던 삼십여 년 전의 꿈과 기억들, 떠올려 보려 해도 희미할 뿐 계곡 물처럼 흘러가 버렸다. 버스 좌석에 누인 노곤한 꿈속에서나 다시 볼 수 있을까나.